[음반리뷰] 피아니스트 서혜지 'The Melodies from East Asia'

[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음반 자켓이 보랏빛이다. 보라색 피아노 건반 윗쪽으로 꽃들이 활짝 피어 수를 놓고 그 옆에는 ‘The Melodies from East Asia’라고 음반 제목이 커다랗게 씌여 있다.
그 위로 피아노 건반과 같은 보랏빛으로 토루 타게미추, 유호정, 변현주, 마수이룽, 이영자, 박운회 이렇게 여섯 명 작곡가 이름이, 아래에는 피아니스트 서혜지의 이름이 놓여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과 현대성이 섬세하게 교차하는 사운드스케이프
지난 7월 25일 미국 navona records에서 발매된 피아니스트 서혜지의 첫 앨범 <The Melodies from East Asia> 표지는 이 곡들의 아름다움과 피아노곡으로서의 대표성을 상징한다.
일본, 한국, 대만 작곡가들의 현대 피아노 작품 다섯 곡과 오보에와 피아노 듀오곡 한 곡이 담긴 의미 깊은 모음집이다.
서혜지는 2016년 뉴욕 카네기 와일 리사이틀 홀에서 데뷔하였으며, 이후 브뤼셀 팔레 데 보자르, 필라델피아 키멜 아트센터, 밀러 극장, 미시간 윌리엄 스튜어트 메모리얼 쉘 등 다양한 명망 있는 무대에 초청받아 연주했다.
그녀는 American Protégé 국제 피아노·현악 콩쿠르,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Brussels’ Grand Prize Virtuoso, International Piano Association Competition에서 1위를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Interlude의 리뷰에서 서혜지는 “섬세함과 자신감이 공존하는 연주로, 곡마다 섬세한 해석을 선보이면서도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delicate and confident, delivering nuanced interpretations of each piece while preserving a consistent artistic voice)”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interlude.hk)
이번앨범에서도 역시 다양한 색채와 표현력으로 동아시아와 서양 음악전통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는 연주가 인상적이다.
앨범의 첫 세 곡이 토루 타케미쓰(Toru Takemitsu, 1930~1966)의 곡이다. 첫 곡 ‘Piano Pieces for Children(1979)’의 1악장 ‘산들바람(Breeze)'의 싱그러움이 가슴을 적신다. E장조의 편안함 속에 바람처럼 순차 하행하는 선율을 서혜지는 담대하고 우아하게 펼치며 이 곡의 길이인 단 45초 만에 앨범 전체에 대한 편안한 인상을 제시한다.
2곡 ’Clouds‘에서는 하늘의 구름처럼 꿈꾸는 듯한 선율선과 여백의 미를 섬세한 터치와 세밀한 페달링으로 만들어내며 작곡가의 자연미학을 잘 살려낸다. 이 곡은 어린이 프로그램 ‘Piano no Okeiko (피아노 수업)’의 강사 이노우에 나오유키(井上直幸)의 요청으로 제작되어 1979년 10월부터 1980년 3월까지 NHK 교육 방송에서 방영된 바 있다.
3곡 ‘Romance’(1948, rev. 1949)는 타케미쓰가 스무 살에 작곡하여 그의 스승인 작곡가 야스지 기요세(清瀬 保二)에게 훗날 헌정되었다.
중간부에 더욱 격렬함이 드러나고 내면을 향한 대항해가 시작되는데 이 곡 로망스에서의 2도를 포함한 클러스터의 충돌적 음향과 4도 화음에서 느껴지는 포용력은 작곡가가 동경하고 영향 받은 드뷔시와 이 앨범의 모든 현대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음향들로 앨범의 방향성을 말해주고 있다.
서혜지의 앨범에서 앞 곡은 다음 곡의 안내자가 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마지막 곡 박운회의 랩소디를 제외하고 24트랙 거의 대부분이 2분 내외인 것에 비해 유호정의 ‘선을 넘어(Beyond the Line'(2019)은 5분 30초로 길다.
단 악장의 곡으로 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작곡가는 2016년에서 2017년 사이 한국의 촛불집회라는 역사 속 중요한 장면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첫 부분의 저음에서 빠른 하강의 타격음이 강렬하고 이어지는 반복적인 리듬이 자유를 향해 뛰는 심장고동 같고, 반면 중간부에 망설이고 부유하는 듯한 모습이 공존하는 다면적인 곡이다.
이어 오른손 옥타브와 4도의 선명한 음형이 노래되는데 자유와 평화를 외치던 우리 시민들의 모습과 함성이 슬로우 모션으로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 몇 소절간의 4도 음향이 앞 드뷔시와 맞닿은 타케미쓰에서는 자연과 내면에 연결되었었는데, 유호정의 곡에서는 억압 중에 외치는 자유, 평화와 만난다는 것은 음악만이 할 수 있는 실로 환희로운 장면이다.
또한 그것은 연주자를 통해야만 하는데, 서혜지는 이러한 음향의 동질성과 다면성을 적재적소에서 펼치며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게 작품 안에서 드러내주고 있다.
극단적인 4도와 2도음정의 충돌로 내면의 갈등을 넘어 곡의 중반부부터 서혜지의 손끝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며 피아노 고음과 저음 전음역을 오가며 희망차게 전진한다.
자유에의 갈구는 다시 경계선에 막히는 듯 보이지만, 곡 마지막 부분에 재등장한 곡의 첫주제를 더욱 강렬하고 의지적인 타건으로 서혜지는 그들과 함께 경계선 앞에 서서 그럼에도 다시 시작할 것임을, 끝나지 않았음을 강렬히 외친다.
변현주의 ‘아라리 : 정선아리랑에 의한 5개의 변주곡'(Arari: 5 Variations on ‘Jeongsun Arirang’ for Oboe and Piano)은 2023년 한국여성작곡가회의 위촉으로 탄생했고 서혜지와 오보이스트 파블로 에르난데스(Pablo Hernandez)에 의해 초연되었다.
주제곡에서 오보이스트 파블로 에르난데스는 선명하고 애상적인 연주로 주제를 각인시키며 서혜리 또한 빛깔 있는 화음으로 오보에를 품어준다.
이 곡은 교회 음계(church modes), 다조성(polytonality), 자유 반음계(free chromaticism) 등 다양한 조성을 탐구한다.
1변주에서는 한국전통음악의 시김새를 오보에의 꽉 찬 호흡선으로 연주해내며, 북장단이 되어 시원한 광목천처럼 펼쳐지는 피아노의 고동이 멋스럽다.
아리랑의 멜로디가 두 세 음이라도 뚜렷이 들리지 않는 2변주가 어떻게 아리랑 변주인가 의문스러울 수 있지만 그 다음 물결 위를 걷는 것 같은 3변주에 가면 그러한 물음표는 자연스레 사라진다.
3변주에서는 중심음을 '수식했다'는 느낌의 꾸밈음이 아니라, 꾸밈음과 시김새가 더욱 느린 리듬으로 펼쳐져 자유로워지면서 꾸밈음이 중심 선율자체가 되어 오보에와 피아노에서 연주되며 청각적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이 곡은 마치 2트랙 Clouds와 3트랙 Romance를 섞어놓은 듯하다.
4변주에서는 리드미컬하고 빠르게 무조에 가까운 자유 반음계 꾸밈음과 스타카토 연주를 선보이는데 특히 오보에의 건조하고도 우수에 찬 음색이 굿판의 나팔소리처럼 무속성(巫俗性)을 알린다.
5변주에서는 무속성이 서혜지 피아노 저음의 강타와 고음 클러스터로 연결되고 오보에의 파블로 에르난데스는 그 비트를 가로지르는 글리산도와 빠른 시김새 음들로 변주를 이끌어가며 정선아리랑을 각인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감상을 자극하는 연주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사운드의 구조와 정서를 인식하게 유도한다. 서혜지는 이 변주곡을 통해 ‘동아시아 전통음악’과 ‘현대 피아니즘’이 맞닿는 지점에서 자신의 언어를 만들었다.
마 수이롱의(Ma Shui-Long)의 1969년 작 ‘비오는 항구의 스케치(Rainy Harbor Sketches)’는 대만 지룽 항구 도시의 물빛 이미지를 서정적이고 몽환적으로 그린 4개 악장의 피아노 작품이다.
1악장 “비(Rain)”에서 서혜지는 잔잔하게 요동 없는 거울 같은 물결을 왼손으로 표현해내면서, 오른손은 빠르게 폭넓은 피아노 전체음역으로의 움직임을 유려한 손놀림으로 세찬 비의 물줄기를 표현해낸다.
2악장 “비 내리는 밤 항구 경치(Harbor Views on Rainy Nights)”에서는 빠르게 오르내리는 선율리듬으로부터 뚜렷이 들리는 음계적 특징이 이국적 정취를 강화하였다.
3악장 “조개를 줍는 소녀(The Girl Who Collects Seashells)"는 이 곡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부분으로, 다른 악장과 마찬가지로 5음음계와 온음음계를 사용하는데 단선율적인 진행 속에서도 피아노의 미묘한 색채를 풍부히 드러낸다.
서혜지는 어린 소녀의 맑은 시선을 음악적으로 구현하듯, 음과 음 사이의 정적까지도 연주의 일부로 만들어낸다.
4악장 “사원 문 앞(At the Temple Gate)”에서는 E저음의 고동 위에 사원이라는 신비한 공간의 문을 여는 것을 아르페지오 음형과 4도 옥타브 화음의 신비롭고도 장중하게 표현했다.
다음은 이영자의 ‘엄마야 누나야에 의한 8개의 변주곡’ (8 Variations for Piano, based on‘Umma Ya Nuna Ya’) (1996)으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남동생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김광수 작곡의 한국 동요 '엄마야 누나야'(1922)의 가사는 1922년 김소월 시인이 지었으며 강변살자는 것은 은유적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과 자유를 뜻한다.
선율은 오행음계(五聲音階, 펜타토닉)를 기반으로 한국 특유의 정서인 한(恨)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영자의 변주곡에서는 20세기 유럽 스타일까지 절묘하게 결합되어 색채적인 피아니즘을 선보이고 있다.
첫 곡은 원곡을 성가나 프롬나드처럼 4분 음표 한 박자씩 화성을 채우다가 서서히 왼손 아르페지오가 시작된다.
첫 변주가 저음부터 고음까지 오르내리는 셋잇단음표 반주로 애상적인 느낌을 준다면, 두 번째 변주는 8분음표 반주로 조금 더 담대해졌으며 주제는 여러조를 타고 흐르며 자유롭게 변모한다. 3변주는 4도 화성의 반음계 진행이 몽환적으로 변주된다.
더욱 내밀한 소회를 드러내듯 음악이 진행되다가 어두운 분위기로 왼손은 저음을 강타하고 오른손은 고음의 옥타브를 오가며 전환되는 국면이 더욱 신비롭다.
4변주부터는 주제의 변주가 더욱 내밀해지고 세부적이다. 빠른 리듬에 4도화성에 클러스터를 가미한 음향으로 피아노 음역을 단순간에 종횡무진한다.
5변주는 변현주의 아리랑 변주곡 2변주에서의 의아함처럼 자유로운 변주인데, 여기야말로 '엄마야 누나야 변주곡'이 현대적 화성과 피아노 기법을 통해 민족적 정서에 더해 개인적 고통과 슬픔까지를 담아낸 지점이고 서혜지는 매개자이자 창조자로서 피아노를 잘 드러내주어 차분히 정돈되고 집중되는 부분이다.
6변주는 4도음정의 클러스터가 고무공처럼 투명하고 빠르게 움직이는데 재즈나 사물놀이도 약간 닮았다. 잠시 엄마야 누나야 첫주제도 누르고 지나가는데 외딴 곳에서 아는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갑다.
7변주는 점점 더 대담해지며 사유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 8변주에 이르면 왼손과 오른손의 대위적 모방과 빠른 아르페지오 등 색채적 화려함으로 "주제가 변한 것, 주제의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변주가 아니라 순화된 감정으로서의 담대해진 나를 표현하는 새로운 주제로 거듭나는 것이 느껴진다.
대망의 24트랙은 박운회 작곡의 '한국 광시곡(Korea Rhapsody)'(1975)으로 9분 30초의 작품인데 이 음반 전체가 궁극적으로 녹여내고자 하는 피아노의 음향을 제목에서부터 드러내고 있다.
'새야 새야', '밀양 아리랑', '도라지', '종묘 제례악' 등 한국의 대표적 민속 선율이 론도 구조로 사용된다. 처음에 도라지 타령으로 시작해 빠른 양손의 상행 아르페지오는 곡의 스케일을 가늠케하는데 오른손이 두터운 화음을 동반해 멋스럽게 움직이는 동안 왼손은 3연음부 반주나 빠른 16분음표 반주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서혜지는 민요 선율의 생명력을 다양한 현대 피아노 기법의 드러냄 속에서 한 곡의 항해를 짜임새 있게 표현해 내고 있다. 중간부의 휘몰아치는 빠른 아르페지오를 지나면 고요하고 잔잔한 '새야 새야'를 지나 종묘제례악 선율이 슬쩍 높은 음역에서 시작한다.
민요 변주 사이에 궁중음악이 4도 화음의 꾸밈음을 동반하며 귀엽게 한 풍경을 장식하며 소리로서, 소리로써 휴식을 주는 장면은 정말이지 멋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협주곡이었으면 실제적 카덴자가 되었을 곡의 6-7분 지점인 그 종묘제례악 부분을 지나 다시 장중한 '새야새야'를 지나 마지막에는 '도라지'와 '밀양 아리랑' 가락이 화려한 화음에 과감한 꾸밈음을 동반해 “여기 우리가, 한국의 음악이다!”를 강렬하게 선포하며 작품집을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총평 / 추천의 말
서혜지의 이번 앨범 'The Melodies from East Asia'는 그녀의 음악적 정체성과 동아시아 음악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잘 드러나는 앨범이다.
전통성과 현대성, 섬세함과 강한 표현이 조화를 이루며, 클래식 피아노 애호가 뿐 아니라 동아시아 음악에 관심 있는 청중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앨범은 단순한 음반이 아니라, 작곡가의 언어와 정서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특히 한국 작품들에서는 작곡가의 의도와 한국적 정서를 자신의 톤으로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강력히 추천할 만한 앨범으로, 이 앨범은 서혜지의 음악 여정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며 앞으로 그녀가 펼칠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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