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김대훈 개인전, No Reason, 11월 11일부터 29일까지 오매갤러리에서 전시

이화미디어 2025. 11. 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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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김대훈의 전시회를 핑계로 ,,,

나는 도예 작품에 대해 논할 수 있을 만큼 전문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론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그냥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친구가 보내는 어설픈 사랑의 고백이다.

젊은 날 연애편지를 쓰는 사람은 안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새벽을 맞았을 때 느꼈던 당혹함. 사랑이 너무 뜨겁고 벅차면 글로는 표현이 불가하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는 느끼지 못할 것이라 믿었던 그 시절의 달콤씁슬한 경험을 했다.

 

활화산에서 분출하는 용암처럼 어디에도 담을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쓰고 지우기를 수 없이 거듭했다. 그러나 결정의 순간은 운명처럼 온다. 나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는 단순함에서 나온다. 하여 나는 인간 김대훈과 작가 김대훈을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해보려 한다. 한 사람의 삶과 작품에 대한 단순화가 지닌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함마저 사랑이길 간절히 바라며.

그리움/

그리움처럼 순수한 감정이 있을까? 그에게는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어머니가 자리한다. 그에게 어머니는 흔히 모자지간에 있을 수 있는 알콩달콩한 일상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런 것의 결핍에서 비롯된 애잔하고 짠한 그리움이다.

상처/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을 지니고 산다. 시간과 더불어 상처는 아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흔적은 묘비명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아는 그는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산다. 상처는 한 인간에게 고통이지만 도예 작가의 작품을 위해서 뜨거운 불길이 필요하듯이 그는 이를 외면하지 않는 것 같다.

수직/

그는 수직적 인간이다. 수평적 인간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수평적 인간이란 세상에 대충 타협하며 ‘좋은 게 좋은 것’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수직적 인간은 내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고흐나 자코메티와 같은 예술가가 떠 오른다. 나는 여태 김대훈처럼 수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

자유/

자유는 생각처럼 간단한 주제는 아니다. 각자 편한 대로 사는 게 자유일까? 아니다. 진정한 자유란 나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기존의 틀을 깨려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다. 모두가 옳다고 믿는 것도 과감히 의심하고, 필요하면 저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함부로 문제 삼을 수 없는 사회적 타부나 동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관습과 관념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자유는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간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 적힌 글이란다. 죠르바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김대훈을 통해 나의 죠르바를 만난다.

김대훈의 작품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복합적인 메시지가 녹아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나는 나의 삶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수평으로 기울면 와인 몇 병 들고 이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는다.

 

그곳에 김대훈과 그의 작품이 있어 중력에 못 견뎌 누워가던 나의 삶이 조금은 수직 방향으로 일어서는 행복한 경험을 한다.

 

김대훈 개인전

l No Reason l

오매갤러리

2025. 11.11 - 11.29

화 - 토, 11시 - 17시

오프닝 리셉션

2025. 11.11(화)

16시 - 17시30분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7길 20

T. 070-7578-5223

www.omae.co.kr

@omaeco

 

나는 내가 만든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내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개인전은 긴 여행 중에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 지금 팅커벨을 닮은 요정과

달이 뜨게하는 주문을 아는 시간이란

딸과 함께 시간의 강을 건너고 있다.

● 지미 핸드릭스가 신이 되는 것을 보았다.

● 나는 중환자실에서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브라나를 들으며

마법사 오딘을 만나 보았다.

● 그 때 오딘은 내 심장을 꺼내서

마법을 써서 고친 후 다시 집어 넣었다.

● 제니스 조플린을 사랑한 적이 있다.

● 제임스 조이스의 침대에 누워 보았다.

● 성 페트릭이 죽은 날 태어났다.

● 커피를 마실 수 있음과 만년필을 쓸 수 있음에 중력에게 감사한다.

요즈음 나는 내가 시간인 것 같은 생각을 한다.

학력은 굳이 쓰고싶지 않다.

경력은 내세울 만한게 없다.

이번에 들린 간이역에서

연극의 마지막장 무대에 서있는

스카라무슈는 손에 들고있는

빈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처음부터 새가 없었는지,

아니면 연극 중간에 날아갔는지,

그 새가 부엉이였는지,

아니면 까마귀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큰 일은

마지막 대사가 생각이

안난다는 것이다. 스카라무슈는

즉흥 독백을 하기로 했다.

"당신이 누군지 몰라도 난 언제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저는 조금 후에 엘리시움이라는 역에서

내릴 것 같아요."

김대훈 개인전 《No Reason》

흙, 물, 불 그리고 언어유희

홍지수 미술학박사, 미술평론

드로잉을 위한 화면의 연속

김대훈의 작업은 형태보다는 회화와 번조에 방점이 있다. 그의 작업은 물감 대신 물질을 거듭된 뿌리기(dripping)와 흘리기(pouring), 그 위를 가로지르는 힘찬 붓질 이후 전사지로 오리고 붙인 이미지와 텍스트 조합이 형성하는 깊고 두터운‘중층구조 (multilayer)’가 가장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특징이다.

 

빛바랜 듯한 텍스트와 이미지 그리고 작가의 몸에서 분출된 힘과 움직임의 궤적이 흙으로 만든 화면, 덩어리를 화면 삼아 불로 안착시킨 도자 회화가 김대훈의 작업이다.

회화는 복잡한 단계를 거쳐도 흙으로 빚은 형태는 단순하다. 판성형한 판재를 정∙직사각형으로 자른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 평면이고, 6장의 흙판 꼭짓점과 빗변을 직각으로 맞물려 세우면 육면체 즉, 입체다.

 

육면체는 원통과 함께 예술, 디자인, 건축을 아우르는 기초 디자인의 조형 언어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의 익숙한 형태다. 김대훈은 정육면체(Prism), 직육면체(Cube)를 합(盒), 의자(스툴), 화기(花器)로 제작한다.

 

기물을 적층해 쌓으면 파티션, 설치 등으로도 형식이 달라진다. 도판도 액자에 끼우면 회화가 되고 건물의 외벽에 걸면 도벽이 된다.

 

이처럼 공예와 순수예술, 일상과 상상을 횡단하는 매체 트랜스포머적 요소는 김대훈 작업의 개방성이고 사유와 표현의 자유로운 횡단을 상징한다.

육면체는 시공간 속에서 다양한 재질과 빛, 시각 주체의 시선에 따라 입체감과 구조적 특징, 이미지를 달리한다. 모든 면에서 같은 면적을 볼 수 있는 정육면체와 달리 직육면체는 좌우 측면, 정면, 상부 면의 크기가 다를 수 있다.

 

시각 주체가 사물을 어떤 방향으로 어떤 위치에 놓고 바라보는지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지난해 청주 네오아트센터의 개인전《No Reason》의 설치 <무제>(2023)는 작가가 육면체를 가지고 어떠한 다양한 시각성의 조합을 만드는지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시다.

 

그는 4단 선반 칸 칸마다 형태, 크기, 표현, 질감, 색채 다른 14개의 정육면체와 직육면체 함을 놓았다. 형태와 크기 유사성, 어울림에 따라 작가가 그룹핑한 조합은 가변적으로 자의적이다.

 

어떤 조합으로 전시장 벽에 혹은 중앙에 선반을 세워 놓는 지에 따라 주체는 정면으로 혹은 주위를 돌면서 위치와 방향을 달리하며 다른 것을 볼 것이다. 존 버거(John Berger)가『본다는 것의 의미(About Looking)』에서 제기한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본다”라는 행위를 둘러싼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것이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시각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조각 혹은 설치이지만 기물의 쓰임을 배제한 것도 아니며, 작가가 자신의 공간 혹은 경험 속에서 가장 일상적인 사물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 작품의 의도를 굳이 공예와 예술을 횡단하거나 하나로 만들려는 의도를 읽기보다 그가 평소 작업하는 방식처럼 툭툭 던지듯 무심코 놀 듯 관객에게 던지는 화법이자 언어유희처럼 보는 것이 좋겠다.

 

존재과 부존재의 공간 : 사각형과 육면체

직육면체∙정육면체 함은 사용 가능한 공예기면서 자아가 머무르는 실존의 공간 즉, 존재의 사유를 표방하는 장(場)이자 영토다. 관객이 없는 텅 빈 연극 무대 위에 홀로 선 배우처럼 집, 의자, 돌, 부처의 두상, 목마 등의 사물을 홀로 두었다.

 

사물의 부피만큼 남은 빈의 공간은 늘 존재의 외로움과 고독, 실존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허(虛)를 상징한다. 육면체는 함, 상자로, 의자, 집, 자동차로 작품마다 형태를 달리한다. 그러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은 모두‘부재(不在)’의 상징이다.

 

그가 화면에 그리고 혹은 오브제로 만드는 소재(집, 의자, 상자, 선반, 목마 장난감, 돌, 사과 그리고 수북이 눌러 담은 고봉밥 등) 또한 모두 작가와 관련된 과거의 기억이나 개인과의 관계 에피소드에서 왔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공간의 시학(La poetique de l'espace, 1958)』에서 말한 것처럼, 기억에서 추출한 모든 형태는 그와 연결된 기억과 꿈을 담는 내면의 공간이자 상상력의 원천이다.

 

그는 자신의 기억에서 추출한 형태들을 화면에 그리거나, 상자 안에 담거나 그 위에 올려 둔다. 방치가 아니라 소중히 담거나 고이 올려 둔 느낌이 있다. 시절 지난 신문이나 미술 잡지에서 오려낸 텍스트, 사진, 일기나 메모, 누군가와 주고받은 편지 등을 콜라주했다.

 

작가의 내러티브와 관련된 날짜 혹은 이미지 등 작가와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원본을 전사지로 옮기면서 일부는 지워지고 문맥은 잘리고 초점이 흐려졌다.

 

우주를 떠다니는 먼지들처럼 이미지들이 깊고 두터운 바탕 혹은 검은 필획 위에서 유령처럼 표면을 유영한다. 사라짐을 붙잡으려 하고 그리워하기에 거듭 그리고 불러내는데, 왜 그들은 도리어 실체로부터 멀어지고 빛바래고 흐릿해지기만 하는 걸까.

 

나와 연결된 무수한 존재들

이번 전시 《No Reason》에서 김대훈은 유약 대신 산화/염화코발트, 산화철, 산화동, 망간 등 산화물 또는 염화물을 회화 안료로 사용한다. 산화물 또는 염화물을 비정제 상태(가루, 원석) 그대로 사용하면, 번조 이후 예상외에 흥미로운 불규칙한 결과를 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도판을 그리고 육면체를 다수 횡으로 늘어놓고 조금씩 재료와 회화의 방법에 변화를 준다. 시도마다 다르게 발생하는 불연속적인 순간, 흔적 등을 목격하고 응대하면서 몸의 궤적을 바꾸고 물질의 사용 순서와 방법을 바꾼다. 그것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다.

 

타자의 눈에는 그의 화면, 육면체의 표면이 그저 작가의 의식이 흐르는 데로 마구잡이로 물질을 그리고 흩뿌린 난해하고 복잡한 화면, 연속되지 않는 단어나 문장을 동원한 텍스트 콜라주, 한자 한자 꾹꾹 눌러 찍은 음각 자인(字印)의 문장, 색연필로 그린 희뿌연 낙서로 채워진 복잡한 낙서 어느 것을 먼저 실마리로 독해해야 할지 연결고리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서구 미술에서 연관 없는 사물을 병치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이나 이미지의 연상 작용을 통해 단어 혹은 이미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변화하는 오토마티즘 기법과 닮아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화면의 주체이자 끝말잇기의 시작은 작가다.

 

자신에게서 추출한 하나의 단어로부터 떠오른 말이나 문자, 소리, 의미, 이미지 등을 끄집어내고 계속해서 연결하다 보면, 그 결과 화면에는 처음 시작한 단어의 의미와 끝, 그들 사이의 연결 관계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복잡계가 형성된다.

 

겉으로는 유사성이 없는 무의미한 조합, 나열에 불과한 듯하지만, 김대훈의 텍스트는 작가가 자신의 실존 혹은 기억에서 호명한 단어로부터 다음 단어로 거미줄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화면은 필촉과 텍스트가 앞 것을 뒷 것이 덮고 덮으며 끊임없이 쌓일수록 앞선 것은 사라지는 연역적 방식이다. 작가가 자신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을 물질의 색, 질감, 깊이 등으로 시도할수록 화면에는 내러티브가 복잡하게 얽힌다.

 

그것은 우리의 삶, 존재가 그렇듯 일목요연하지도, 명징하지도, 예측 가능하지도 않다.

도자예술과 회화의 조합이 시도 가능한 불가항력적이고 실체적인 물리 법칙 안에서 작가는 물질에 올라탈 수 있는 신체성, 리듬감, 힘 그리고 언어의 전달력을 하나씩 이어 붙이고 조합하며 화면 속으로 차분히 돌진하고 다음 화면으로 나아간다.

 

흙, 물, 불로 장난이나 해볼까 하는 가벼운 모양새가 아니다. 자신의 의식체계 안에서 있는 언어, 기억, 감각을 전부 끌어들여 화면 위에 부려 놓는다.

 

그리고 자기 내면에서 불연속적으로 끄집어낸 언어가 원래 무슨 의미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를 흙, 물이라는 원초적인 물질의 언어에 대입하고 되어가는 형국을 차분히 관조하며 직관적인 시선으로 포착하듯 응대한다.

 

그러니 김대훈의 작업을 도자예술, 공예 같은 매체 분류 혹은 순수미술의 캔버스와 붓의 대안으로 시도하는 아방가르드 혹은 실험미술 등으로 획일적으로 나누고 규정하기에는 부족하다.

 

궁극의 물질, 근원적 질문

흙 그리고 산화물 또는 염화물을 그대로 사용한 그리기는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물질 속에서 깃들어 있는 역사 속의 무수한 생명 그리고 타자들과 작가의 몸이 일대일로 만나는 과정이다.

 

물질 속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실체하는 관념, 역사 속의 수많은 타자의 몸과 시간이 깃들어 있다. 그것을 살아있는 자가 손으로 비비고 몸을 움직이며 접촉하고 있다. 자기 몸을 움직이고 흔적을 만드는 것은 살아있음을 의미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거듭 질문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러나 인간은 실존적 질문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또 다른 개체를 비출 때 제 가치를 갖는다. 무수한 인연의 고리 속에서 서로 연결된 무수한 구슬이 서로를 비추고 연결되어 있는 인드라망의 세계. 그 속에서 나는 내 옆의 다른 구슬에 비친 모습으로 나를 확인할 수 있다.

 

구슬은 과거 그의 가족, 친구 등의 인연일 수도 있고 존재와 관계를 알 수 없지만 나와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종당 흙이 되고 물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들일 수도 있다. 그가 흙과 물질 안의 존재들과 몸으로 만난 후, 물로 물질을 씻고 지우고 흘려보내는 이유다.

 

그것은 그리기라기보다 흙과 물이 만나 섞이고 번지고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흙과 물이 하는 것이며 그 안의 무수한 존재 그리고 시간이 하는 것이다.

스스로 생성하는 흙 그리고 스스로 흘러 침식하고 스며들고 어디론가 흐르는 물의 속성은 비단 작가의 시각 언어의 속성에도 부합한다. 작가의 의식은 늘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한 언어로 가득하다. 무엇이 실체처럼 잡힐 것 같다가도 곧 실체가 사라지곤 한다.

 

희미한 것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하기 위해서 그는 부단히 그리고 지속해서 그리고 텍스트를 생산하며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이미지, 단어, 문장이 물처럼 유유히 흐르고 퍼져 나가기를 바라지만, 늘 어딘가에 부딪히고 정지한다. 그럼에도 다시 지속하는 그의 재현은 자기 존재의 궁구를 멈출 수 없기에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이 흙을 씻어 새로워지고 정결해지고 새로운 지형으로 거듭난다면, 불은 흙을 소멸하고 태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불은 모든 것을 전과 후로 나누는 폭발적인 힘으로 분리되어 있던 존재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것은 전과 후가 전혀 다른 새로움이다.

 

도자예술에서 그리고 우주 태초의 생성 과정에서 불의 태움은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의 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의 과정이다. 그러니 흙, 물, 불로 이어지는 물질에 대한 탐구 그리고 생성과 소멸을 바라볼 때마다 인드라망 속에서 무수히 연결된 존재들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순환에 이른다.

 

그리고 늘‘나는 누구인가?’ 그리고‘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여지없이 고개를 든다. 답을 얻고자 끊임없이 기억 속에서 상(想)을 떠올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단어를, 문장을, 이미지를 연결하는 일이 김대훈의 작업이다.

 

그것은 과거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흙, 물, 불, 공기를 만물의 근원으로 여기고 이끌려 철학하고 상상력을 펼쳐 알고자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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