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88개의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손이 춤춘다. 그런데 피아니스트 윤혜성의 피아노 위에서는 춤추는 것이 손만이 아니다. 팔목도 춤추고, 타자기도 춤추고, 고무도 춤춘다.
<윤혜성 피아노 독주회>가 지난 1월 26일 저녁 7시 30분 서울 한남동 일신홀에서 열렸다. 윤혜성은 서울예고 졸업, 삼익콩쿨, 한국일보콩쿨, 음연콩쿨에서 모두 1위를 하였으며, 독일 쾰른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 현대음악 석사과정, 세계적인 현대 음악 전문단체인 독일 앙상블 모데른의 아카데미(IEMA) 장학생, 칼스루헤 현대음악 국제콩쿨 연주부문 1위 등 국내외 정통클래식부터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경력을 쌓으며 피아노 세계의 확장된 모습을 선보이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번 독주회에서 윤혜성은 박정은, Witold Lutoslawski, 박명훈, Beat Furrer의 작품을 연주하며 피아노 본연의 연주법이나 음색 뿐 아니라 사물들과의 관계로부터 획득한 음색과 다양한 연주방법을 보여주었다.
첫 순서는 박정은의 <"몸짓들"을 위한 피아노>(2021, 세계초연)은 세 개의 곡으로 구성되었다. 곡 전체적으로 타자기의 딸깍딸깍 움직임과 쉼, 박자, 재질, 리듬, 사유, 들숨, 한숨, 그런 것이 1곡의 첫 피아노 음형과 잔향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전체 곡의 원동력이 되었다. 1곡은 '글쓰기의 몸짓'이었다. 타자기로 글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쓴 후 아랫칸으로 이동하는 것을 빠른 음형과 쉼, 그리고 이것의 점층적인 반복으로 표현했다.
강렬한 클러스터 음형으로부터 소용돌이치는 아르페지오가 매력적이다. 또한 프리페어드 피아노(피아노 현에 고무, 금속 등 일상물건을 끼워 색다른 음색을 얻는 기법)의 저음에서 고무 낀 음색이 좋았다. 중간부에는 피아노 위에 타자기를 아예 올려놓고 치는데 이것이 첫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일깨워준다. 나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 주변 사람들이 "피아노 치는 것 같아요"하는 말을 듣는데, 이 곡에서도 피아노와 타자기가 동질화되는 과정이 재밌었다.
2곡은 '음악을 듣는 몸짓에 대하여'였고, 3곡 '탐구의 몸짓'은 풍선 바람넣는 도구 등 일상물건을 현에 대고 실험하는 모습 등으로 표현했다. 박정은이 빌렘 플루서의 <몸짓들: 현상학 시론>에서 이 곡의 영감을 얻었다면, 나는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 곡의 기법도 좋았지만 이러한 접근의 방식이 더 마음에 들었고, 현대음악, 새로운 음향에 대한 감상의 이유가 이 곡으로부터 비로소 느껴졌다. 박정은은 참 대단하다.
두 번째 순서로 Witold Lutoslawski의 <Variation on a Theme by Paganini for 2 Pianos>(1941)는 Jared Redmond가 제2피아노를 연주하며 제1피아노의 윤혜성과 함께 기교와 서정이 충만한 연주를 선보였다. 첫 주제가 이내 한두개씩 불협화음과 3연음부, 32분음표, 꾸밈음 등으로 음폭을 넓히며 매력을 더해갔다. 주제로부터 1, 2 변주가 멋지게 연주되자, 내 앞자리에 앉은 아마도 피아니스트 윤혜성의 제자로 보이는 두 명의 어린이가 "우리 선생님 대단하다!"는 듯한 황홀한 눈길을 서로 주고 받고 있었다.
특히 전환점이 되는 6변주는 제2피아노가 고음 주제음으로 순차 하행하고, 제1피아노는 저음부터 상행하는데 이 느린 잔잔한 화음은, 마치 남녀가 이제야 서로를 알아보는 듯한 뭉클한 감정을 일으켰다. 거울처럼 투명한 7변주, 속주하는 기차 같은 8변주를 지나, 9변주에서 제2피아노는 고음의 강렬한 선율을 연주하고, 10변주는 클러스터와 아르페지오의 익살이 경쾌하다. 대망의 11변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화려한 마천루 같은 위용과 웅장함이 두 피아니스트의 열정과 파워의 연주로 시원하게 마무리 되었다.
전반부 마지막은 박명훈의 <雪夜(눈오는 밤) for Piano and Live-electronics>(2021, 세계초연)였다. 프로그램지에 작곡가가 전라북도 완주의 어느 고택에 머물렀을 때의 밤 풍경을 표현한 곡이라고 적혀 있었다. 첫 눈 알갱이 같은 고음 피아노 소리로 시작해 그 뒤 곡선의 '띠용'거리는 전자음향 소리가 뒤따라간다. 저음으로 눈이 겹겹이 쌓이고, 흰 눈은 쌓여 서로를 비추고, 그 속에서 중음역대로 물길이 이동하고 서로 부딪히고 녹는다. 알알이 부서지는 눈의 입자들, 좁은 공간의 울림과 정처없는 헤매임, 이로부터 점점 커지는 공포감과 한편의 경이감이 피아노와 전자음향에서 느껴졌다.
이 곡의 두번째 부분은 쌓인 눈이 쓸려지는 소리를 표현했는데, 이 사포 같은 소리가 특히 청량감을 주며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피아노의 저음과 고음이 대비되며 빠른 속도로 무너져내린다. 소리 자체의 물리적인 속성이 잘 분석되어 논리적으로 구조화되니 그리려던 형상과 잘 맞아떨어져 감성적인 정취가 있었다. 이게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술 먹고 해장한 느낌이랄까? 현대음악이 연구하는 음악이지만 소리 자체만을 위한 음악, 골방에 갇힌 음악이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들 작곡가들의 연구와 그로부터의 해소는 그 어느 해갈보다도 크다.
인터미션 후 Beat Furrer의 작품이라 기대를 하며 2부 시작을 기다렸다. 곧 윤혜성이 다시 무대에 등장해 인사를 했다. 불현듯 의상컨셉이 뭘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 검은 시스루 블라우스의 양쪽 팔을 가로로 길게 눕혀 건반을 팔 안쪽으로 살며시 누르면서 악보를 올려다 본다. Beat Furrer의 <Phasma for Piano>(2002, 한국초연)가 시작된 것이다.
팔을 눕혀 건반을 치기 위해 허리를 숙인 자세가 흡사 윗사람에게 조아리거나 절하는 자세 비슷했는데 이렇게 피아노를 우러러 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런 자세가 그 클러스터음을 치는 동안 계속되는데, 피아노를 이렇게 계속 치나 궁금해졌다. 그 자세는, 즉 팔로 치는 클러스터 음은 앞 2분여 정도 계속되었다.
Phasma는 '유령, 귀신'이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그 클러스터음이 유령이었을까. 작곡가는 고속열차 주행 중에 창밖을 내다볼 때 먼 물체는 고정되고, 가까운 물체는 빠르게 지나가는 그 대비를 표현했다고 한다. 피아노 현에는 고무를 댄 것 같은 음색도 나고, 피아노 현을 연주하기도 한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빠른 스케일로 상행, 마지막엔 계속 피아노의 제일 높은 C 음을 "도,도,도..." 하고 치고 갑자기 양손 팔로 '쾅' 하고 격렬하게 친 후 다시 앞부분처럼 반복한다.
내가 쉼표와 간헐적인 음표의 앙상블 연주 때에 쉼표와 음표 사이에 악기 주자간 느낌 연결이 잘 안되더라는 글을 일전에 쓴 적이 있다. 곡 후반부에는 이런 간헐적인 음의 연주가 있었다. 윤혜성의 음표와 쉼표는 안 지루하고 오히려 사유감이 느껴졌다. 스포르찬도의 고음 후 중음역대의 음이 페달로 지속되고, 마무리로 동시에 저음과 고음 스타카토를 하는 형태의 연결이 점점 반음씩 올라간다. 어디를 향해 달려갈까, 어느 음까지 올라가나 궁금하며 이제야 권태롭고 위태롭다고 느끼는 그 순간, 왼손과 오른손이 고음부에서 강렬히 겹치며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당신은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현대음악 연주회는 이렇게나 다채롭게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이 날도 우리 빼놓을 수 없는 코로나 중 두 자리 띄어앉기의 현실이 슬펐다. 하지만 이 날 <윤혜성 피아노 독주회>에는 새해가 되어 한 살 더 먹어서도 두 자리 건너의 서로를 듣고, 현대음악 전문 연주자 윤혜성이 각별히 마련한 새로운 현대음악에 준비된 사람들이 모였다. 이렇게 2021년에도 모든 움직임과 음의 이동은 계속된다. 모든 것에 음이 있고, 어떤 것도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 당신만 열려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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