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나의 창작 세계는 한국적 전통미와 자연미의 현대적 적용에 있고 옛 것을 익혀 새로움을 고안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에 기반 한다.
전통미의 기저에는 한국적 정체성을 토대로 전통 미술의 내적 아름다움과 이미지로 표출된 여러 요소가 있다.
향토성, 역사성, 토속성 등을 지닌 전통 목공품은 그 자체가 삶의 흔적이며 독특한 문화원형의 보고(寶庫)이다.
친연성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영역에는 인간의 생과 소멸의 원천으로서 도도한 시간의 흐름이 작동하고 있다.
우주적 질서 아래 대지와 물이 있고 하늘과 별과 바람이 움직이며 산과 바다와 들과 강이 아름답게 사철 강건한 모습을 보여준다. 변화를 멈추지 않는 자연 그 속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품속처럼 언제나 따뜻하고 편안하다.
나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공예의 영역과 기능이 특정한 공간과 범위에 고정되거나 갇혀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현대공예의 역사가 짧고 공예의 사회적 역할과 통념이 모호한 시대적 환경에서 제기된 전공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오히려 이 분야 세부 장르와 표현기법에 많은 관심을 갖게 하였다.
특히 손맛이 나는 수공예 작업의 흥미가 동기 유발이 되어 공예성보다 보기에 아름답고 심미적인 공모전 작품과 그룹전의 일품 성격의 작품들에 매혹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런 독창적인 작품들을 추구하며 열광하였다. 공예의 사회적 역할은 이념적으로 정리하고 가슴에선 내려놓았다.
영역의 확장과 일품공예의 창작성을 선택하고 작품 활동에 많은 비중을 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어떤 독특한 형태의 나무로 다듬어 내는 것은 신명 나고 또 나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
이러한 젊은 시절 추억과 경험들은 나의 목공 작업에 기초로 작용되어 ‘좋은 재료를 활용해 늘 새롭되 조형적이며 힘 있고 기품 있는 형태를 추구’하게 하였다. 또 ‘간결하되 볼거리가 있게“.
목공 작업을 시작하고 4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내 작업을 자연과 전통, 또는 전통과 자연에 기대어 끌고 왔다. 청년 시절 실험적인 작업과 힘으로 밀어붙인 정겨운 몇 년을 제외하곤 거의 일관된 생각을 담아냈다.
기능적이며 심미성 있는 목가구와 목공예품, 옻칠공예품과 나전칠기, 문화상품 등과 무기능의 오브제를 재미있고 단정하게 만들었다.
수공예를 통해 만드는 기능적인 작품 이외의 오브제 작업은 공예 본래의 속성에서 보면 ‘쓰임’이라는 공예의 일차적 기능과 거리가 있다.
게다가 재료와 형태 표현이 대단히 조형적이고 감각적 처리가 돼야하는 특성이 있다. 이것엔 어떤 정리된 의미의 표상을 통해 인간 내면에 순화된 시각적 감흥을 들추어냄으로서 ‘쓰임’ 기능 못지않은 중요한 미적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줄곧 오브제 성격의 소재를 많은 작품에 표현해 왔다.
수공예의 기능성과 오브제에 표현된 정관적 측면의 심미성은 어느 한 쪽이 강조될 수 있으나 서로 융합되어야 제맛이 난다.
‘따로 혹은 같이’ 표현되면서 의미 있고 아름다우면 좋은 것이고 예술적이면 더 좋은 것이다.
내가 전통미를 표현하는 방식은 가구의 경우 몸체의 형태나 구조에 보이는 전통형식을 시원한 비례로 치목하는 것이다.
특히 구조를 활용하는 편이며 견고한 접합부 처리를 하며 각재와 판재는 원칙에 맞게 적용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은 차별하지 않는다.
각재는 제작 후 뒤틀림이 없어야 하고 판재는 색과 목리가 아름다워야 한다. 노출된 접합법은 사개물림이나 방두산지 기법을 활용하고 서랍판과 문판은 자연스러운 나뭇결의 흐름과 좌우 대칭을 선호한다.
또 현대적인 단순한 형태에는 몸체 앞면에 연꽃무늬나 서랍판 등에 전통무늬를 새겨 넣어 장식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가구 몸체나 오브제 형식의 상부에는 평행하거나 좌우 모서리 한 곳에 경사진 모양으로 목어를 간결하고 표정 있게 처리한다.
그 밖에 삼족조, 참빗, 기마인물상, 금관, 주작(朱雀), 기러기, 오리, 창살문, 구름문 조각, 파도문 상감 등의 요소를 활용하곤 한다. 이런 전통소재 중에 목어는 그간 내 작품세계의 대표 이미지로 굳어진 셈이다.
이것은 나무로 다듬는 수공예적 묘미가 뛰어나다. 또 불가(佛家) 목어 이미지의 과한 장식성을 간략히 정리해가는 과정이 재미있어 소재로 즐겨 쓴 까닭에 기인할 것이다.
물고기가 우리 문화에서 의미하는 상징성은 생명과 행운, 지킴이,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 그리고 종교적 메신저로서 수중 동물의 해탈 등이 있다.
특히 어변성룡(魚變成龍) 형식은 역경을 극복하고 노력하면 어느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 물고기가 용이 되는 ‘등용문’의 유래와 관련이 있는데, 이러한 스토리는 내겐 매우 흥미롭다.
그래서 길상적 의미의 전통 목어를 오방색채와 생동감 있는 형태로 다듬어 우리 삶의 실내 공간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목어, 즉 나무로 만드는 물고기는 유선형 몸통과 얇은 지느러미 몇 장이 형태의 전부여서 입체 표현의 다양성 측면에선 많은 제한 요소가 있는 주제이다.
상상력과 창의력의 바탕이 탄탄하지 않은 경우엔 오래 끌고 갈 작품의 주제로는 좀 버겁다.
그런 점에서 보면 두발 달린 조류나 네 발의 동물이 형태의 다양한 변주에 훨씬 유리한 것이다.
예술 작업은 선택과 집중의 개념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완성도에 따라 작업의 성패가 드러난다.
이제 와서 굳이 변주와 완성도에 유리한 다른 주제에 한 눈을 파는 것은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간의 의리를 버리는 꼴이다.
그래서 얼마 전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던 중에 목어의 채색 작업을 멈추고 나무 재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변화가 주는 시각적이고 정관적 측면의 느낌은 신선하다.
채색을 지우고 생략하는 것이 다소 생경하지만 재료의 아름다움과 스토리는 오히려 강조되는 느낌이 든다.
오래된 채색이나 흔적이 그대로 있지 않고 풍화되어 탈각하면 다시 새로움의 형성과 꿈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지된 구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야 말로 인생이나 작품에서 관성을 벗어나는 선택적 시도이다.
내가 즐겨 쓰는 자연미는 인간의 본래적 정서에 기초한 신명과 생명력의 원천인 자연에서 새롭게 발아하는 돌기, 새 순, 사각 뿔, 나비, 잠자리, 이파리 등을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해 왔다.
이런 따뜻하고 정겨운 소재들을 목공품에 붙이거나 깎아 나간 것이다.
또 가구 제작에서 단일 목재가 갖는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해 서랍 앞판에 자연의 숨결을 상징하는 ‘바람의 이미지’를 표현해 왔다.
이것은 가로의 길이 방향으로 색상이 대비되는 다른 목재를 켜 붙이는 세목적층기법(細木積層技法)으로 완성된다.
‘바람의 이미지’는 원초적 자연의 형상이지만 삶에 배어있는 추억과 내면에 축적된 자화상의 은유이다.
이런 형식을 단순하고 간결한 구조의 목가구에 적용하면 대비와 함께 목물 특유의 묵직한 정감을 일으킨다.
2010년 이후에 대학의 연구 과제를 진행하면서 옻칠작업에 관점을 갖게 되었다. 옻칠은 연원이 꽤 오래된 재료로 옻칠공예의 현대화는 절실한 상황이다.
옻칠의 현대화는 기형과 문양표현의 창의적 처리가 우선하고 고식적 통념을 벗어나 현대인의 기호에 부응해야 가능하다.
이런 생각으로 옻칠 작품을 디자인하고 최근 옻칠과 나전칠기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여기에는 생생한 이파리, 연꽃넝쿨무늬, 모란넝쿨무늬, 풍죽(風竹), 우죽(雨竹) 등 자연 소재들이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다.
특히 바람에 세차게 날리는 풍죽과 비에 젖은 우죽의 나전 디자인은 처음 시도하는 것이어서 6개월의 공부와 시간이 소요될 정도로 집중하였다.
지난번의 연꽃넝쿨항아리와 모란넝쿨항아리 작업에 비하면 디자인에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운필이 아닌 명확한 나전 무늬와 새로운 형식의 칠기 표현을 위해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의 필법을 익혔다.
특히 형태 너머의 청정불변의 기품과 탈속의 느낌을 담아내려고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였다.
예술 작품은 새롭고 한 눈에 쉽게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칠기 작업은 전통 형식의 성격이 강하고 자연 소재의 무늬들이 조화를 이루는 분야여서 전통미와 자연미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필자에겐 매우 즐거운 일이다.
오랜만에 서울서 여는 작품전은 목공이나 칠공예의 수공예 작품전이 귀하기 때문에 기대도 되지만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작품의 조형성에 관한 부족함과 아직 비우지 못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전에 임하는 부끄러움은 크다.
이만큼의 작품이 있기까지 성원해준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4. 8. 12. 임승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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