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지난 16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영등포구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에서 열린 '2024 최혜연 작곡발표회 -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는 일상의 소리와 감정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생각하게 해주는 전자음악 공연이었다.
첫 곡 'Durch'는 '거울과 센서, 라이브 전자음향과 청중을 위한‘이라고 편성명에 적혀있다. 즉 청중도 악기편성이 되는 것이다. Durch는 독일어로 ’통과하여, 관통하여, 이리저리, 구석구석‘이라는 뜻이다.
공연장 모서리 네 곳에 스피커와 그 바로 앞에 거울이 놓여있고, 여기에 빛이 비취지면 스피커에서 왈츠, 정치뉴스, 팝 음악 등이 무작위로 흘러나온다.
첫 곡이 진행하는 동안 관객은 늦게 입장할 수도 있고, 보통의 음악회처럼 의자에 앉아서가 아니라 관객들은 공연장 이곳저곳을 걸어 탐색한다. 소리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핸드폰으로 거울에 빛을 쏘며 변화하는 소리를 경험할 수 있다.
소리를 듣는데 내가 무얼 해야 한다니, 또 여러 명이 걸어다니는 통에 약간 불안하기도 하지만 ‘왜 이러지? 이게 뭐지?' 하는 호기심의 첫 순서는 공연 전체에 문제제기의 창구역할을 한다.
장방형의 박스시어터 어둠의 공간에 객석은 한쪽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처럼 서로 상대 측 관객을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었다. 익숙한 앞 쪽이 아니라 뒤편에서, 여자(나중에 프로그램지를 보니 퍼커셔니스트 박혜지. 2019년 제네바 국제 타악기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 그래서인지 종이 찢는 소리도 리드미컬했다.)가 악기도 없이 책상에서 종이를 찢고 있다.
벅벅 찢는다. 이젠 스프링노트의 용수철로부터 ‘드르르르륵’ 맛깔나게 뜯어내는 소리까지 스피커를 타고 흐르더니 저음이 깔리고 공연장의 스피커 20곳에 여러 층위로 분산되어 소리가 들려온다.
‘공부하기 싫은가 보다, 신경질 나는 일이 있나?’ 잠시 이런 생각하는 사이, 200ml 스파클링워터를 흔들고 따는 소리마저도 부글부글 스피커 곳곳에서 끓어오른다.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소리 만들기, 야외용 PA스피커가 아니라 네 벽면 관객들 위치에 퍼져있는 작은 스피커들에서 다채롭게 변조되는 소리의 ‘공포(?)’는 일종의 쾌감으로까지 변경된다.
신경질적으로 매직펜으로 종이에 글을 쓰고, 책가방에는 왠 넓은 유리테이프를 들고 다니는지 그걸 또 주욱 찢는다.
책가방에서 4권이나 되는 스프링노트를 책상에 꺼내고는 공부를 시작하는게 아니라, 가방을 다시 싸려고 탁탁 각을 맞추는 소리까지 우리는 이 여자 혼자 책상에 앉아 부리는 신경질의 정서를 20개 스피커로 느꼈다.
각 잡힌 노트를 책가방에 넣고 물통도 넣고, 그녀가 책상을 떠나면 곡이 끝날 줄 알았더니 주인공(아마 작곡가를 대변하는)은 이제 책상 위에 엎드려 잔다. 바닥엔 찢어버린 구겨진 종이가 널부러진 채 있다.
이 곡의 제목은 'What's in my bag'이었고 이 작품의 야무짐에 기자는 슬며시 웃음도 났다.
세 번째 작품 'Stille Nacht, Heilige Nacht' 밤에 대한 심상을 현악삼중주로 나타냈다.
공연장 2층에 관객 대신 연주자들이 공연 시작부터 앉아있었는데, 여기서 미세한 음량으로 악기끼리 주고받는 비브라토, 고음과 하모닉스가 곡을 구성한다.
프랑스 남부 시골마을의 여름밤 들려오는 두꺼비 울음소리와 모기의 날갯짓, 소리의 작은 발생 하나도 주목하게 하는 밤을 통해 이 곡에서는 우주를 표현했다.
바이올린(김혜지)과 비올라(김규), 첼로(남유리나)의 흐느낌 같은 긴 상하행 글리산도와 비브라토가 악기 간 교차해 다시 출발하는 움직임이 좋았다.
인터미션과 중간박수 없이 공연은 하나의 음악극처럼 진행되었다. 네 번째 곡인 판소리와 라이브 전자음향을 위한 'Motherhood'는 사실상 전자음향적으로는 가장 테크니컬한 곡으로 보였다.
장방형 공연장의 가운데에 정사각형 무대가 있고 스피커가 그 둘레로 놓여 있다. 여기에 판소리 주자 문수현이 둥근 수조 속 자갈을 매만지며 피에조 마이크로 그 소리를 증폭시킨다.
그녀의 흐느낌과 긴 호흡의 지속음이 둘레의 스피커 각각에서 여러 층을 만들며 환상적인 바다 같은 소리는 낸다. 우리 안의 감정을 매만져주는 듯한 판소리 주자의 나직한 소리의 펼침과 스피커의 레이어가 멋진 작품이었다.
마지막 곡 '땅의 경계에서 울리는 시간'에서는 도시에서의 바쁜 삶 속 염원이 드럼과 비디오, 전자음향을 통해 통쾌하게 울려퍼졌다.
물론 영상 스크린이 앞쪽에 있는 이유겠지만, 마지막 곡에서 드디어 관객이 공연장의 앞 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오는 안도감이 공연에 또 집중하게 했다.
드러머 오상목의 즉흥연주는 맺고 치고에 탁월했으며, 이 소리는 비디오(김정환)의 지하철 풍경이 어둑한 지하통로로부터 지상으로 올라가 도시의 아파트를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과 어울리며 속도감을 준다.
화면은 점차 가로 세로로 분절되고, 공연 내내 공연장 한복판에서 비트감을 형성하며 소리에 큰 역할을 하던, 분해된 우퍼 스피커도 이 음들속에 주인공이 되었다. 곡 마지막에 마름모꼴 엠보싱처럼 울퉁불퉁한 영상의 질감이 드럼의 타격형태와 어울렸다.
연주자와 관객의 즉흥요소도 존재했던 이 날 작곡발표회는 부제 '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 ASMR'에서 보여지듯, 의도와 소리, 행위의 관계가 세밀하게 기보된 작곡방식보다 오히려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잘 드러났기에 의미가 있었다.
왜 사람들이 ASMR에 열광하는지, 유튜브를 통해 소리에 집중하는지도, 이번 클래식 공연의 전자음향을 통해 또다른 차원으로서 깨닫고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mazl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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