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현대음악에서 우리는 뭘 기대할까? 현대음악이라는 용어의 막연함과 엉뚱함을 차치하고라도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현대(Contemporary)’라는 말에서 도대체 현대스러움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지난 13일 한남동 일신홀에서 공연된 <박정은 작곡발표회>에서 관객들은 뚜렷한 ‘현대성’을 얻어갈 수 있었다. 2차접종 증빙하는데도 그 어느 작곡협회 발표회보다도 관객수가 많아 놀라웠다. 한번 박정은 작곡가의 아방가드르 사운드를 경험한 관객은 기대를 갖고 그 다음 음악회를 방문하는 '박정은 파워'를 느낄 수 있었다.
소리의 질감과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부터 오는 사건의 전개는 작곡가가 종종 문학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 문학까지도 음악에서는 결국 박정은의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다. 다섯 작품의 소리들은 피아노 현위에 종이 테이프를 붙여 먹먹한 소리를 만들거나, 풍선 바람 넣는 도구로 바람소리를 만듬과 동시에 바람 넣는 행위를 보여주었으며, 바이올린 현을 보통처럼 활로 길게 긋지 않고, 오히려 현 방향으로 활로 옆으로 강하게 문질러 끅끅 거리는 소리를 내는 등 일상적이지 않은 주법으로 만들어진 소리들이었다.
첫 곡 <몸짓들>(2021,재연)은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몸짓들: 현상학 시론>에서 영감받아 작곡되었다. 1악장 '글쓰기의 몸짓'은 타자기 모습 그대로 빠른 음형이 오른쪽으로 이동 후 탁탁 치고 왼쪽으로 자판이 휙 돌아오듯이 피아노 음형이 글리산도로 내려온다. 실제로 타자기를 피아노(지유경) 위에 놓고 치는 부분으로 몸짓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2악장 '음악을 듣는 몸짓'은 연주자가 헤드폰을 머리에 썼고 3악장 '만들기의 몸짓'은 바람넣는 기구로 피아노 현에 바람을 들이민다. 첫 곡에서 소리와 행위는 강렬했는데, 그 느낌은 굉장히 사유적이었다.
두 번째 곡 <소외>(2021, 세계초연) 시작 전에는 첫 곡만 해도 새로워서 이후 곡은 안 봐도 배부르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후에도 각 작품들이 다양한 음향과 전개로 흥미를 끌었다. <소외>에서는 바이올린(강민정) 활을 옆으로 세게 문질러 끅끅 소리를 내거나 첼로(주윤아)와 강렬한 피치카토, 피아노(윤혜성) 현에 금속을 끼워 타악성의 소리를 내는 사이 클라리넷(김욱)의 저음과 고음 선율의 울부짖음으로 그로테스크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피어오른 바이올린의 하모닉스 고음의 렌틀러는 한줄기 소망 같았다. 곡 설명에는 한병철의 <피로사회> 글귀가 써 있었다.
세 번째 곡 <깊은 심심함>(2021, 세계초연)은 작곡가가 바쁜 현대사회의 멀티태스킹의 위해를 걱정하며 깊은 심심함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쓴 작품이다. 타악기(문지승) 솔로의 빠른 리듬은 분주히 여러 악기, 여러 리듬으로 이동하다 끊어지고, 때로는 합쳐지는데, 글 쓰다 1588 전화도 받아야 되고, 냄비에 라면 물 끓이며 유튜브 채널 돌리다가 10개 넘는 카톡 답도 하구선 곡 써봐야지라고 빈 오선지를 펼치는 누군가의 모습과 똑 닮았다. 그래서인지 마지막에 타악기 위에 빈 종이를 펼치고 끄적 끄적 글씨쓰는 사각사각 소리로 끝나는 지점은 작곡가 본인인가 싶기도 하다.
네 번째 곡 <그 때 그 공기들에 대하여>(2021, 세계초연)는 곡해설과 제목을 들리는 소리와 음향에 대입해보면 딱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1악장 '현대음악'에서는 해설에 '내가 가장 재밌게 추는 춤'이라고 써 놓았는데, 아코디언과 두 대의 아쟁, 피아노가 마치 탱고를 분절시켜 현대음악으로 치장해 놓은 것 같은 느낌으로 흥겨움이 있었다. 2악장 '그 겨울, 눈 오는 새벽'은 아코디언(오은아)과 아쟁(최민선)의 선율에서 슬슬불다 몰아치는 추운 겨울바람이 느껴지고, 종이테이프를 붙인 피아노의 하행음계가 눈 오는 소리 같았다.
3악장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는 한강의 소설 <흰>을 표현했는데, 이 표현을 위해 악기들이 다함께 마구 긁고 모터를 피아노와 아쟁에 대고 긁는 소리를 내어 인상을 주었다. 4악장 '검은바다'의 설명은 '묵은 고통이 부서지는, 그을린 잔해들이 끈덕지게 부서지는, 캄캄한 바다'라 되어 있는데, 아코디언의 불협화음이 더욱 음산하며, 앞 3악장의 주법들이 더욱 강렬하게 모터소리와 짧은 음들로 부서지며 장면을 느끼게 했다.
이날의 대미를 장식한 곡은 <얼룩진 잔향들>(2019, 2021개작, 재연)이었다. 박정은이 독일유학 때 집앞이라 자주 방문했던 쾰른 대성당의 높은 첨탑, 창문의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 동방박사 3인의 유골함에서의 느낌을 앞 작품들처럼 현대주법으로 묘사했다. 라디오 단파가 지직대는 소리, 플루트(오병철) 주자가 오르골로 캐롤을 연주하고, 바하 코랄이 약하게 변주되더니 선명한 코랄 선율로 전면으로 드러났다 다시 아득해지기도 하고, 강렬하게 끝난다.
악보는 작곡가 최초의 지시이다. 그리고 작곡가가 유일하게 소리를 구체화하는 수단이다. 박정은 작곡가의 팜플렛에는 다섯 곡 모두 악보 부분 페이지가 실려 있었다. 공연 전과 곡과 곡 사이 악보를 보고 음악을 들으니, 그냥 소리만 듣거나 곡 해설만 봤을 때보다 감상이 구체적이 되는 측면이 있었다.
아방가드르 뮤직의 행위와 강렬한 사운드를 작곡가가 '어떻게' 지시하고 구체화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들을 수' 있는지 박정은의 팜플렛 악보를 통해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대상과 현상에 대해 서로마다 가진 소릿결은 다르겠지만, 우리가 다함께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현대음악'을 구체화해야 하는지 필요를 느낄 수 있는 음악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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