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중인 베를린 신포니에타 상임지휘자 박성준(47).
[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세계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국인 지휘자는 많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유일하다고나 할까.
그 벽을 깨고 음악의 본고장 유럽, 그 중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독일 베를린을 한국인 지휘자가 ‘접수’했다. 2012년 베를린 신포니에타 상임지휘자가 된 지휘자 박성준(47). 지난 5월 2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내한 기자간담회를 가진 그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가 이끄는 ‘베를린 신포니에타‘는 1952년 동독에서 생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1974년에 만든 챔버 오케스트라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는 서독의 대표적인 ‘베를린 필하모니’ 멤버들도 ‘베를린 신포니에타’로 모여들었다. 실제로 현재 악장은 ‘베를린 필하모니’, 부악장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이 겸임하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베를린 신포니에타’는 베를린의 양대 음악당인 ‘베를린 필하모니’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두 곳 모두를 근거지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는 자유분방한 챔버 오케스트라로 자리잡게 됐다.
지휘자 박성준은 2005년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베를린 신포니에타와 크리스마스 연주회를 지휘한 인연으로 1년에 3-4회 객원지휘를 해오다 2012년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부임 이후 작년 송년음악회와 특히 올해 3월 부활절 콘서트를 전석 매진의 성공으로 이끌었다. 부활절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몰다우’,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였다. 특히,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은 아바도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음반을 낸 러시아의 유명 피아니스트 '릴리야 질버스타인‘과 함께했다.
"이번 부활절 연주회는 폴란드 바르샤바 로열심포니와 연합으로 연주했어요. 보통 프로페셔널은 이틀만 리허설을 맞추게 되죠. 그런데, 이번에는 바르샤바에서 3일을 비공개로 공연하고, 베를린에서 단 하루 공연으로 총 4일이나 공연했어요. 그만큼 열정적으로 한 거죠. 금관, 목관, 타악파트가 폴란드 단원들이었는데, 소리가 정말 좋았습니다."
경희대 음대를 89년에 졸업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체코, 폴란드 등지에서 객원지휘 활동을 하던 그가 어떻게 베를린 신포니에타와 인연을 맺었을까. “빈 국립음대 지휘과 칼 외스터라이허 교수에게 배우려고 찾아갔죠. 제 스승님이십니다. 처음에 교수님이 ‘여기서 내게 배운 경력으로 한국 가서 교수일 하려거든 나한테 배우지 마라’며 독일에서 공부와 동시에 지휘자로서 직업을 잡을 것을 조건으로 제자로 받으시더라구요"
칼 외스터라이허는 플라시도 도밍고, 마리스 얀손스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도 개인적으로 레슨을 받으러 올 정도로 지휘계에선 명망있는 교수로, 빈 국립음대 교수직 외에 자신의 개인학교(Private School)를 운영한다. 박성준은 2004년 외스터라이허의 타계 직전 마지막 제자로 그의 추천으로 폴란드 킬츠 오케스트라, 92년 쥬네스 페스티벌 등에서 지휘하며 차곡차곡 경력을 쌓다가 드디어 2004년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송년음악회에서 지휘자로 공식 데뷔한다. 그 때 연주한 곡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바흐 ‘마태수난곡’이다.
▲ 지난 5월 27일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진 지휘자 박성준.
독일의 메인 무대에서 독일의 정통 클래식을 상징하는 베토벤 교향곡, 그것도 ‘9번’ 교향곡을 동양인이, 한국인이 지휘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2012년에는 베토벤의 양대 교향곡이랄 수 있는 교향곡 9번 ‘합창’을 신년음악회에 서베를린 지역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부활절 음악회에 교향곡 5번 ‘운명’을 동베를린 지역의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공연했다. 독일의 중심부 베를린, 그 베를린의 양쪽을 대표하는 홀에서 정통 독일 작품으로 승리한 것이다.
"정면승부가 중요하죠. ‘정공법’이라고 해야겠군요. 일반적으로 청중이 잘 아는 곡, 예를 들어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등을 연주하는 게 더 어렵죠. 관객이 알던 기준과 다르게 연주되면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거든요. 그럴수록 저는 낭만이나 현대 음악보다 정통 클래식으로 승부를 봅니다. 저의 베토벤 교향곡 5번 연주에 ‘불꽃이 지나가는 것 같다. 가식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다’ 는 평을 하시더라고요. 5번 교향곡 1악장 빠르기말이 ‘Allegro con brio(경쾌하고 기운차고 활발하게)’ 잖아요. 사람들을 선동하는 음악, 제가 좀 그런 스타일에 맞는다고 그랬어요"
그는 어떻게 지휘를 하게 되었을까. 그냥 지휘가 제일 쉬워 보였단다. 관객을 등지고 오케스트라를 향해 뒤돌아서 지휘봉을 휘두르면 멋진 음악이 울려퍼진다. "중학교 2학년 때 카라얀이 스타였죠. 그 시절 클래식에 미쳤었어요. 음악에 입문한 나이치고는 늦은 편이지만, 이후 피아노 공부하고, 고등학교 가서 작곡 공부하며 지휘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그가 존경하는 지휘자가 궁금하다. “브루노 바일을 존경해요. 91년 비엔나 마스터클래스에서 브루노 바일에게 배웠는데, 전 세계 50명이 모인 중에 탑 3위 안에 들었어요. 그분은 제게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담백하고 과장이 없는 지휘스타일이면서 음악에 정열이 있는 분이죠. 담백하면 심심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서 열정이 있는 분입니다. 저 역시 굉장히 비슷해요. 지휘스타일이나 템포를 이끄는 성향이 비슷하고, 그런 이유로 선생님도 저를 좋게 생각하셨어요."
그렇게 유럽무대에서 인정받기까지, 사실 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음악의 본고장 유럽에서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이라서 힘든 점이 분명히 있을 텐데.
"물론 유학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에는 힘들었죠. 하지만, 요즈음 베를린에서 동양인이라서 어려운 점은 없어요. 오히려 자랑스럽죠. 지금 베를린에서 한국의 위상은 대단합니다. 삼성 모바일폰 유명하잖아요. 우리나라 기업들의 분투나 우수한 기업들이 해외에 많이 알려져 있어서 저희가 힘을 많이 받는 게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개인 연주자들이 열심히 해서 커나갔는데, 앞으로는 지휘자들이 더욱 많이 발전해서 그 연주자들을 이끌어야 할 단계입니다"
한국에 자리 잡을 생각은 없나. “정명훈씨처럼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연주활동을 하는 것도 좋죠. 베토벤 곡, 말러 교향곡을 좋아해요. 저희 오케스트라는 평균 단원수가 70명 정도인 챔버오케스트라 형태지만, 곡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신축적으로 단원 편성을 자유자재로 늘릴 수 있습니다. 1999년에 130명 규모였던 적도 있는데, 그때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을 연주한 적이 있어요. 대규모의 그런 베를리오즈 레퀴엠을 지휘해보고 싶습니다"
▲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과 9번으로 승리한 박성준 지휘자.
그에게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논리적 인과관계와 객관성이죠. 그게 서양음악의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클래식음악을 듣다가 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음악적 인과관계가 논리적으로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논리적이고 들을만한 것이 들리는데 잘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연주를 할 때 저는 최대한 작품의 뒤로 숨어요. 작품은 작곡가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예요. 내 작품이 아니잖아요. 저희 선생님이 강조한 것이 바로 그겁니다. 필요이상의 동작이나 과한 주장, 개성을 가급적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지휘자 박성준에게 지휘자로서의 꿈을 물어보았다. “음악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지휘자가 되고 싶어요. 음악은 음표를 매개체로 청중과 지휘자가, 작곡가와 지휘자가 서로 만나는 거잖아요. 이 모두 음악은 객관적이고 순수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죠. 사람과 사람의 만남, 인격과 인격의 만남. 멋지지 않아요?"
좋은홀에 가서 좋은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게 제일 좋지만, 소유할 수 있는 좋은 오디오로 듣는 것도 현장감 만큼이나 큰 충족감을 준다. 그가 쓰는 스피커는 호주제 던테크 소버린(Duntech Sovergin)으로 그 높이만 해도 2m나 된다. “좋은 스피커로 들으면 좋지 않은 스피커로 들을 때와는 심지어 템포조차도 다르게 느껴지고, 음사이의 아고긱(Agogics)이나 여백이 다르게 들리죠. 건반의 터치, 손가락의 느낌이 제대로 된 시스템에서는 살아나는데, 가격이 낮은 시스템에서는 잘 들리지 않아요” 그는 성황리에 마친 지난 3월 베를린 콘체르트홀 부활절 공연 녹음에서도 세심하게 관여하여 12개의 지향성 마이크를 사용해 녹음했다.
그가 아끼는 불후의 명반 세가지로는 푸르트뱅글러와 빈필이 EMI에서 52년에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교향악단이 60년도에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페렌츠 프리차이가 54년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있다. 이 중에서 특히 그는 푸르트뱅글러의 음반을 꼽는다.
"제가 공연을 하고 나서, 혹은 음악에의 기준점을 다시 회복하고자 할 때, 이 음반을 들으며 ‘나는 멀었다‘라고 마음을 되잡곤 합니다. 오디오가 제 취미이자 공부방법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하지 않을 때는 주로 음반을 들으며 연습을 하죠. 보통 지휘자들은 다른사람의 음반을 잘 안 드드는 편인데, 저는 굉장히 많이 듣습니다. 오디오가 선생님이기도 해요."
그에게 인생의 목표를 물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전 세계의 수도라고 불릴만한 곳이죠.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무대에 서고 싶어 해요. 전 아직도 사이먼 래틀이 저에게 메일로 지휘를 제안하는 꿈을 꿉니다. 최종꿈은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빈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되는 것이죠. 꿈은 기왕이면 높은 게 좋잖아요?(웃음). 얼마전에는 콘체르트하우스로 저에게 팬레터도 왔어요. 저에게 더욱 많은 연주기회가 있기를 바라고,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렇게 보니 늘 악보를 보고 음악을 듣는데, 취미도 오디오다. 음악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음악이 직업이자 유일한 취미로 보인다. “아니요, 요샌 한국에 오면 아내와 집 앞 청계산에 등산합니다."
그래도 그에게서는 음악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젊은 시절 그를 지휘로 이끌었다는 카라얀의 비디오를 보며 ‘미쳤다’는 시절의 표현처럼, 그의 어느 인생시절 음악에 지휘에 오디오에, 단 한번도 미치지 않았던 적이 있었을까. 그것에는 음악에 대한 열정, 믿음,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근본이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mazla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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