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라오페라단 '안나 볼레나'. 왼쪽앞부터 메조소프라노 방신제(죠반나 역), 소프라노 이다미(안나 역), 베이스 양석진(엔리코 역). 

 
[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KBS 2TV 주말드라마를 보면서도 내 귓전에는 지난 주말 본 라벨라오페라단 <안나 볼레나> 2막 시작의 여성 합창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왜 이럴까. 요 근래 양반집 가문 아들 아닌 딸 셋이 이모네 하숙집에서 펼치는 좌충우돌 이야기 <오케이 광자매>를 보는 것이 내 일주일 삶의 낙이다. 아, 그런데, 왜 라벨라오페라단이 6년만에 공연한 <안나 볼레나>는 나한테서 안 떠나느냔 말이다. 

2015년은 안나의 복수, 2021년은 인물의 선택에 집중
 
라벨라오페라단(예술총감독 이강호)의 <안나 볼레나>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관객의 찬사 속에 5월 29일과 30일 3회 공연을 마쳤다. 지난 2015년 <안나 볼레나>를 이강호 감독, 이회수 연출, 양진모 지휘에 국내 성악진만으로 훌륭하게 아시아 초연한 이후 6년 만이다. 

라벨라오페라단의 2016년 <안나 볼레나>가 정통파 무대에 안나의 복수에 초점이 있었다면, 이번 2021년 버전은 미니멀한 무대 속에 각 배역의 입장을 잘 부각시켜 더욱 입체적으로 도니제티의 벨칸토 오페라를 완성시켰다. 

메조소프라노 김정미(죠반나 역), 베이스 김대영(엔리코 역) 

 

긴 서곡이 연주되고 그 사이 붉은 장막에 자막으로 메리 스튜어트, 앤 불린 등 헨리8세의 여섯 아내의 이름과 설명이 보이니 영국 16세기 왕위계승의 치열한 아들 낳기 전쟁이 잘 와 닿았다. 1막 1장 엔리코(헨리8세)와 조반나가 몰래 만나고, 미니멀한 ‘ㄷ’자 형태 무대 2층에서 추밀원단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안나 왕비에 대해 걱정하는 합창을 한다.
 
이어 왕비에게 시종 스메톤(메조 소프라노 김하늘)이 하프를 연주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 마세요”하고 위로의 노래를 건네는데, 나한테 얘기하는 것 같아 속으로 깜짝 놀랐다. 1막 2장 윈저성 앞, 안나의 옛 연인 퍼시와 그의 친구이자 안나의 오빠 로쉬포르(바리톤 최은석)가 노래하는 장면도 멋지다. A팀의 퍼시 역 테너 이재식이 폭넓은 고음의 서정성이 호소력이 있었다면, 같은 퍼시역 B팀의 테너 석정엽은 뮤지컬 배우같은 훤칠한 키와 외모와 미성으로 매력선을 펼쳤다. 

1막 3장 안나를 사모하던 스메톤이 안나의 초상화가 그려진 메달을 가져갔다가 돌려놓으려고 안나의 방에 들어온다. 안나와 퍼시가 들어오자 스메톤이 벽 뒤에 숨는 모습을 벽에 그림자로 비치게 한 기법도 신선했다. 스메톤 역 메조소프라노 여정윤은 발각될까봐 숨을 곳을 찾는 그림자 연기를 풍성한 중저음 노래로 실감나게 해주었다.

퍼시의 사랑고백에 안나는 거절하고, 이에 퍼시가 자결하려 칼을 뽑아들자 막으려 스메톤이 벽에서 나오고, 엔리코 왕이 나타나 방 안의 모두를 감옥으로 보낸다. 이 때 'v'자 구도에 맨 앞에 안나로 엔리코, 퍼시, 로쉬포르, 허비의 5중창 '내 손에 떨어진 그의 눈물이(lo sentii sulla mia mano)'가 힘차게 울려퍼지는데, 노래가사가 서로 안 겹치고 각자 입장의 호소가 이렇게 잘 될 수 있는지 오페라 앙상블의 묘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2막 시작 검은색 면사포를 쓴 시녀들이 왕비를 위로하는 합창을 한다. 노이오페라코러스가 연습을 참 많이 한 것 같고, 잔잔하고 우아하게 시작해 점점 어둠을 노래하는 이 합창이 참 좋다. "아, 왕비님이 행복하던 시절에 아첨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갔나...불쌍한 왕비님 저희는 함께 있겠습니다...눈물은 언젠가 끝나지만 정절은 영원할 것입니다"

안나와 죠반나의 '내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하느님(Dio, che mi vedi in core)' 또한 명장면이다. 붉은 조명과 검정 의상 속에 두 여인의 화려한 기교와 고음으로 팽팽한 대결을 보여준다. 왕실무관 허비 역 테너 김지민도 남성 합창(추밀원)과 대화하며 활력있는 고음으로 왕의 뜻대로 퍼시와 안나를 잡아들이는 역할을 잘 선보였다. 

소프라노 오희진(안나 역), 메조 소프라노 여정윤(스메톤 역). 

   
광란의 안나가 결혼식이라며 흰 면사포를 쓰겠다고 한다. 하늘을 향해 소용돌이쳐 날아오르는 나비장식 무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왕관 모양의 천장 샹들리에가 내려와 나비장식과 안나를 감싸고 감옥이 된다. 나비 감옥 속 안나의 아리아 '울고 있나요...내가 태어난 아름다운 성으로 데려다 주세요(Piangete voi?... Al dolce guidami castel natio)'가 아련하다.

A팀의 소프라노 오희진이 맑고 청아한 음색으로 인내의 안나를 보여줬다면, B팀의 소프라노 이다미는 좀 더 파워있는 목소리로 의지에 찬 안나로 표현했다. 2015년에도 엔리코 역을 한 B팀의 베이스 양석진은 더욱 연륜있고 강단있는 왕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2015년에도 죠반나 역을 했던 A팀의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또한 안정되고 풍성한 성량으로 매력의 죠반나를 어필했다.

새로 합류한 A팀의 엔리코 역 베이스 김대영 또한 위엄있는 노래와 연기로 엔리코를 표현했으며, B팀의 메조소프라노 방신제는 왕과 왕비에 충성하면서도 새로이 쟁취하는 야욕의 내면을 잘 표현했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출연진과 제작진, 노이오페라코러스와 양진모 지휘의 뉴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게도 열화와 같은 브라보와 박수를 보냈다. 
 
이회수 연출은 “역사를 통한 오페라를 Re-examination이 아닌 Reillumination(재조명)으로 바라보고자 했다"라면서 "나비는 변신의 상징이다. 안나의 죽음이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새로운 삶과 연결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작은 날갯짓은 헨리8세가 꿈꾸던 태양이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연결된다"라고 2막 마지막 나비무대를 설명했다. 

안나 역 소프라노 이다미는 “작년에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에서 '피의 메리' 여왕을 연기했는데, 올해는 그 적이랄 수 있는 안나를 연기하게 되었다”며 “라벨라오페라단 덕분에 <마리아 스투아르다>, <안나 볼레나>등 귀중한 레파토리를 할 수 있었다. <로베르토 데브뢰>도 출연하여 여왕 3부작을 꼭 완성하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는 오페라를 박물관에 걸어놓을 것인가.

기자가 이번에는 보통 리뷰기사 때처럼 공연내용과 제작의도, 관객 반응 등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이렇게 짚어 쓰는 이유가 있다. 어쩌면 라벨라오페라단이 <카르멘>, <라보엠> 등의 레파토리가 아닌 지금껏 <안나 볼레나>를 비롯해 <마리아 스투아르다>, <에르나니> 등을 이 땅 한국에 소개해주는 이유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좋은 것을 꼭 알려주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내 손으로 이루고 싶은 마음. 의협심, 끓어오르는 열정. 특히 음악예술일 경우에는 '좋은 소리'와 그것이 추구하는 미학적 세계가 제일 중심이 된다. 오페라의 정돈된 소리를 통한 삶의 메시지, 그것이 이 미디어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필요하기에 라벨라오페라단과 많은 오페라단, 성악가들이 해 나가고 있다. 

리뷰 글을 일주일 만에 겨우 정리해 갈 즈음에야 팜플렛의 이강호 단장의 인사말을 읽게 되었다.
 
“어딜 가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 오페라 공연을 묵묵히 지켜가는 예술가들과 스텝들에게 이 아름다운 오페라 안나볼레나를 오롯이 바친다”
 
읽어도 읽어도 또 슬프고 이 주말에 자꾸만 눈물이 터져나온다.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까. 그 외로움은 TV와 유튜브, SNS 등의 미디어로 금새 툭 생성하고 소멸하고, 왈가왈부 될 수 있고, 입에 자꾸 오르내리는 인기쟁이가 될 수 없는 오페라라는 거대 공룡, 박제된 화석의 천지를 진동할 울음소리처럼 느껴진다.

B팀 소프라노 이다미(안나 역)

   
미디어 범람 속 오페라의 역할 

오페라 <안나 볼레나>도 TV드라마 <오케이 광자매>도 동서고금 여성들은 참 강하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아직도 검은색 면사포 쓴 2막 시작 시녀들의 합창이 들리는 듯하다. 가사 때문일까, 검은색 면사포 때문일까.  

정보의 홍수 시대다. 너도나도 SNS와 유튜브 등으로 자기표현을 한다. 무수한 컨텐츠가 시끌벅적한 소리로 덮여 있다. 과거 18세기, 19세기 서양인에게 오페라가 당시대의 정보와 감정전달의 미디어였다면, 21세기 한국인에게는 세계역사를 통한 교훈으로 이 땅을 살고, 맑고 정제된 소리로 정신을 일관되게 할 중요한 지표인 것이다. 

오페라와 TV 드라마, 양쪽 다 사람의 이야기다.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들이 살며 느끼고 다시 삶을 이끌어가는 이야기를 오페라는 음악으로, 성악기법으로 한다. 그 소릿결이 다르고 스펙트럼이 다르다. 한국 전통 판소리와 또 다르고, 가요와 또 다르다.

오페라라는 거대 장르가 총체 예술로서 우뚝 서 살아 움직일 때, 한 나라의 존엄성과 위엄이 서릴 것이다. 더 이상 서양 예술이 아니다. 음이라는 질서가 보편화되고 세계 공통어로 되었다면 오페라는 벌써부터 우리의 것이다.

라벨라오페라단의 <안나 볼레나>가 이번에도 그 가교역할을 했으니 도니제티 <로베르토 데브뢰>까지 만날 날이 있지 않을까.  또한 작년 5월에 이어 올 8월 공연되는 라벨라오페라단의 <푸푸 아일랜드>도 기대한다. 

 

 

mazla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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