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스테르담의 조각상 Belle (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2007년 암스테르담 Oude Kerk(Old Church) 앞 광장에 매춘정보센터(Prostitutie Informatie Centrum)의 Mariska Majoor가 세운 Els Rijerse의 조각상 Belle(미인)의 아래쪽에는 "전 세계 성노동자들을 존중하라(Respect Sex workers all over the world)"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비즈니스라고 알려져 있고, 매일 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시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른바 '매춘'이라는 직업은 이처럼 매춘이 합법화되고 심지어 주요 관광 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조차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는 직업이요, 항상 어둠 속에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존재인 것.
▲ 암스테르담의 홍등가 (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지난 7월 28일로 임기를 시작한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예술감독이 마련한 첫 무대는 '순례자' '연금술사' 등으로 유명한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가 2003년 마리아라는 한 매춘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11분'을 모티브로 삼은 국내안무가 초청공연 '11분'으로, 9월 5일(목)부터 8일(일)까지 나흘간 공연되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동명 소설 '11분'이라는 책 제목은 성관계(Sex)에 있어 옷을 벗고 입는다든지 상대방을 애무하는 등의 부가적인 시간을 모두 제외한, 가장 핵심적인 순간들의 평균 지속 시간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한 오로지 육체와 육체의 만남, 거기에서 비롯되고 관계되어진 인간 내면의 다양한 모습들을 마리아라고 하는 한 창녀의 모험을 통해 그리고 있다.
국립현대무용단 국내안무가 초청공연 '11'분에 출연한 허효선, 이준욱, 김보람, 최수진, 지경민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한 달여 남짓. 매우 짧은 준비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만난 이들의 몸짓에서는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을 제법 진지하고도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국립현대무용단 '11분' 중 허효선 (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K-Jazz Trio(이상민, 조윤성, 황호규)의 재즈 라이브 연주가 함께 하는 가운데 무대의 첫 시작을 연 허효선은 사춘기 마리아의 욕망과 갈증을 표현하고 있었다. 팔꿈치나 몸 이 곳 저곳을 긁는듯한 행위, 누운 상태에서 양 손을 가랑이 앞 뒤 사이로 넣어 자신의 성기 부위에서 마주하는 장면 등 아직 성숙하지 않은 마리아가 성(Sex)과 바깥 세상을 향한 모험에의 동경심, 욕망에 대한 갈급함 등을 결코 과도하지 않게, 창의적인 몸짓으로 잘 보여주었다.
▲ 국립현대무용단 '11분' 중 이준욱 (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두 번째 솔로 장면을 맡은 이준욱은 아래 위로 하얀 색 옷을 입고 수경을 썼다 벗으며, 물 위에서 배영과 자유형을 오가며 헤엄치는듯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존재감이 매우 옅은 마리아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클럽 '코파카바나'에서 일하는 수 많은 창녀들 중 단지 하나일 뿐인 신입 창녀 마리아. 원래 안무 의도인 마리아의 양면성을 느끼긴 어려웠다. 차라리 원작 소설의 백마 탄 왕자, 남자 주인공 랄프 하르트를 발레리노 또는 그와 유사한 동작으로 보여주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 국립현대무용단 '11분' 중 김보람 (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국립현대무용단 '11분'에서 관객들의 가장 큰 호응은 '단언컨대' 김보람의 솔로무대에 터져나왔다. 이번 무대는 마치 김보람을 위해 준비된 것인냥 느껴졌다. 김보람의 강렬한 몸짓과 인상적인 연출은 관객들의 숨을 죽이며 무대를 압도했다. 검정 선글라스에 머리 가운데를 두고서 오른쪽 반쪽은 짧게, 왼쪽 반쪽은 길게한 머리, 처음엔 바나나를 들고서 동성애적 표현을 하다가 어느 순간 강렬한 남성으로, 다시 와이셔츠 허리 부위를 넥타이로 묶어 원피스 입은 여성으로 변신하고, 마침내 입고 입던 팬티를 객석으로 던지기까지. 클럽 '코파카바나'를 드나드는 남성 고객들의 다양한 모습들, 특히 테렌스를 김보람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다만, 기대했던 채찍은 등장하지 않았다.
▲ 국립현대무용단 '11분' 중 최수진 (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네 번째 독무를 보여준 최수진은 보다 성숙해진 마리아가 자유를 찾아 떠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컨템포러리한 의상, 한쪽만 신은 발레 토슈즈가 눈에 띄었다. 특별히 최수진의 독무 장면에서만 무대가 계단처럼, 파도가 치듯 아래 위로 움직였다. 브라질의 시골 소녀 마리아가 스위스 제네바로 와 삼바댄서를 거쳐 베른가 코파카바나 클럽의 창녀 생활에 이르기까지 겪어온 모험들을 무대의 일렁임으로 표현한 것일까? 마지막 순간, 최수진은 한쪽만 신은 토슈즈를 벗어쥐고서 무대를 떠난다. 코파카바나에서의 기억을 일깨우는 그 어떤 물건도 고향으로 가지고 가고 싶지 않은 마리아의 심정처럼.
▲ 국립현대무용단 '11분' 중 지경민 (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 11분 공연에서 김보람에 이어 두 번째로 인상적인 대목을 꼽으라면 단연코 지경민의 마지막 솔로 무대 '연필 빌리는 아이'를 꼽을 수 밖에 없다. 파울로 코엘료의 원작 소설 11분의 두 번째 페이지부터 6 페이지까지 단 한 번 등장하고마는, 존재감이 극히 미미한 이 인물은 어른이 된 마리아의 기억 속에서 움츠려들고 안으로만 기어드는, 제대로 욕망하지 못하는 못난 남성형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아가 코파카바나에서 만나는 남자들도 사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마리아가 코파카바나에서 만난 수 많은 남성들 가운데에 어린 시절 마리아에게 연필을 빌리려 한 그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경민은 이런 범상한 남자들의 내면을 약간은 과장스런 몸짓을 통해 아주 잘 표현해 주었다.
▲ 국립현대무용단 '11분' 중에서 단체무 (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문학 작품을 무대에 끌어들인 탓에 짧은 시간, 몸짓만으로는 표현이 어려운 대목은 간혹 무대 위로 간결하게 보여지는 자막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 되었다. 원작 소설의 본문 중 일부 등을 그대로 자막에 반영함으로서 원작의 분위기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부분은 아마도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김경주가 역할은 한 것 같다.
마지막날인 8일 공연에는 좌석이 전석매진 되었다. 물론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원작소설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들에겐 일정 부분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는 공연이었다. 전임 예술감독이 무용수 5명을 이미 선발해 놓은 상태에서 1달여 남짓 짧은 준비 기간이라는 열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은 나름 분명히 있었겠지만 다음 번 부터는 좀 더 치밀한 구성이 있어야 하겠다. 개별 안무가들의 솔로 무대들이 비록 각자는 볼 만 했지만 상호 연관성이 약해보였고, 이를 엮어주는 사이극의 경우 단지 어색함을 들어주기 위해 임기응변식 처방을 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다 많은 시간과 조율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초대 홍승엽 예술감독에 이어 이제 안애순 2대 예술감독의 체제가 본격 시작되었다. 국립의 특성상 레퍼토리 개발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가지 상반된 목표를 함께 추구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국가를 대표하는 현대무용 단체로서 예술성 높은 레퍼토리 개발도 중요하지만 당장 관객의 외면을 받는 무용 분야를 관객이 찾아오도록 대중성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커뮤니티 댄스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장에는 레퍼토리 개발도 매우 시급한 형편이니 단계적으로 해보겠다고 한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앞 길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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