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무대에 마이크인가 했더니 바람개비가 10개 서 있다. 암전 후 왼쪽 하얀 피아노에서 투명인간이 피아노를 치나 보다. 낮은 저음의 고동과 바람소리, 우주를 표현하는 것 같은 빛이 VR홀로그램 영상으로 바람개비에 보이고 하얀 원피스의 그녀가 유령처럼 무대에 등장한다. 보통의 정중앙 무대 앞이 아닌 오른쪽 한 구석 무대 뒤편 검정 피아노에 앉더니 유령 피아노 소리는 강효지의 것이 되었다. 강렬한 저음부터 고음까지의 내달림, 그 끝에서 다시 소리는 사라지고 Seeds이다.
붉은 빛이 벽을 비추이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유년시절이든 자신과 연결된 다음세대의 소리이든 그 소리는 영혼과 맞닿아 있다. 피아노 치는 손가락 다섯 개가 붉은 빛에 의해 확장된다. 무대 벽에 요동치는 그 다섯 손가락 그림자는 강효지에게 자신을 포함해 어느것 하나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애달픈 식구숫자 5이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처럼 이 여름철 이 곳 무대에서도 빗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여인의 몸짓은 처음에는 구슬펐다가 방울을 흔들며 점차로 격렬해진다. 바닥에 누워 벌린 다리가 다시 오므라들고 초록빛 아메바, 아지랑이처럼 다시 태어나는 싱그러움이다. 높은 Eb음과 함께 대각선 방향으로 바람개비가 아니라 VR홀로그램 초록빛 영상을 마주한 그려는 싱그럽다. 그 길을 따라 흰 색 피아노에 마침내 도달하고 1부가 끝난다.
휴지부가 적막하다. 강효지가 조용히 나가서 끝난 줄 알았더니 무대 가운데에 좌대가 깔리고 색소포니스트 강태환이 방석에 앉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순환호흡을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다. 목과 얼굴 볼이 번갈아 울룩불룩거리며 배에서 가슴으로, 목과 볼의 순서로 색소폰에 바람을 이동시킨다. 코로 들어간 숨이 배로 들어가 다시 목으로 볼로 이동할 터. 색소폰의 배음이 피아노로 옮겨지고 맥놀이를 일으키며 서로의 파장을 넘나든다. 이내 갑자기 로봇 같은 속도로 고음부터 속사포 같이 강효지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내려간다. 아 참, 강효지는 이번에는 봄빛 드레스를 입었다. 붉은, 노랑, 에메랄드 빛이 함께 꽃밭을 이루었다.
7월 8일 토요일 저녁 7시 30분의 공연, 관객 중간 입장으로 어느새 관객수가 많아졌다. 그 사이 강태환과 강효지는 왈츠와 렌틀러, 탱고를 오간다. 이들의 즉흥은, 악기에서 한 번도 입을 떼지 않는 강태환 색소폰의 추진력으로, 서로가 제시하는 중심음에서 방향을 찾고 거기에 더해지는 리듬에서 모습을 갖춘다. 색소폰은 저음의 지속음과 순환호흡을 바탕으로, 빠른 리듬으로 푸드덕거리기도 하고, 같은 음을 반복시키며 질주하기도 하고, 읊조림 등 다양한 소리를 낸다. 이에 따라 피아노도 같은 음의 빠른 반복과 일렁임, 읊조림, 옥타브를 짚으며 기괴하고 광기의 빠른 선율리듬을 펼친 후 이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소곳한 서정적 선율을 들려주는 등 피아노가 미모를 갖췄다.
이렇게 피아노와 색소폰 둘의 연주와 뇌데이타를 기반으로 한 VR홀로그램 영상, 빗소리와 녹음된 피아노의 전자음향과 인터랙티브 퍼포먼스로 끝났다면 관객은 영감만을 가득 받고 집에 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똘똘한 퍼포머 강효지, 프로그램지에 “백남준보다 더하다”라는 이돈응 전 서울대학교 작곡과/예술과학센터 교수의 평을 스스로 올린 강효지 국립교통대학교 교수는 교수답게 관객과의 대화를 펼쳐보였다. 성용원 상명대 교수의 진행으로 이뤄진 대화에서 자그마치 여덟명의 관객이 여기저기서 질문을 하고 감상 소감도 말했다.
피아노 칠 때 어떤 느낌인지 자신은 천둥소리처럼 들었다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이에 강효지는 히로시마 원폭과 제주출신인 그녀가 제주 43사건 등 제주의 슬픔을 화산폭발 등으로 빠르고 과격한 음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번 공연은 discrete infinity, 즉 불연속적 무한성을 표현하며 인간의 사고를 대변하는 공연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인문학자도 있었다. 홀로그램이 큰 영사막에 투사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작다는 회화작가의 질문에 클래식 공연장의 조건을 고려하다 보니 10개의 작은 영사막처럼 세워놓은 설치물이 되었다는 답변도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여름 국립국악관현악단의 AI지휘 공연, 김자현 작곡가의 인공지능 작곡 등 기술이 화두가 되는 공연들 중에서, 강효지는 ‘감성’의 문제를 내면의 펼쳐냄, 우주와 우주의 만남으로 풀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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