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KO한국창작음악제 작곡가 조명 프로젝트 제15회 작곡가의 방이 지난 24일 오후 5시,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 3층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나효신 작곡가는 국내에서는 대한민국작곡상을 두 번(1994년 양악부문 & 2003년 국악부문) 받았고, 해외에서는 하버드대학교의 프롬재단, 쿠셰비츠키재단, 젤러바흐재단 등 여러 단체와 음악가에게 작품의뢰를 받아 활동해오고 있는 재미 현대음악 작곡가다.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나효신 작곡가는 이번 10월의 한국 방문에서 "토마스 슐츠가 연주하는 나효신의 피아노음악" 연주회를 지난 10월 16일 이화여대 리사이틀홀, 10월 18일 부산문화회관에서 진행한 바 있다.
이번 작곡가의 방에서는 나효신의 작곡 일대기와 독창적인 작업내용에 대해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저는 유학가기 전에 저는 한국의 평범한 작곡가였고, 이화여대 이영자 교수님 제자였어요"라며 젊은 시절에 대해 설명했다. "대학에서 합창곡, 앙상블 등 다양하게 작곡했었어요. 고등학생 때 작곡하는 것이 재미있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면 작곡가가 되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큰 생각하지 않고 어린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님을 떠나는 것처럼, 스승을 떠나 혼자 작곡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줄 모르고 미국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
93년 가을 석사과정을 나효신은 미국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유학온 사람이나 거기 미국애들이나 나효신의 곡이 비슷했다. 현대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기에 문화적 충격도 없었고 스스로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간 지 몇 주만에, 맨하튼 음대 강당에서 4분 33초로 유명한 작곡가 존 케이지가 특강을 했다. 비 오는 날이라 잘 기억하는데 존 케이지는, “한국에 갔더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일을 하십니까' 묻지 않고, 저를 비즈니스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관현악 음악회를 갔는데, 한국인데 한국전통음계로 곡을 쓰지 않고 서양음악과 똑같이 쓰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존 케이지의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두 발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그래서 국악과 수업도 듣고, 국악기 레슨도 받으러 다녔고, 한국음악도 정말 많이 들었다. "옆집 아저씨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분이 제게 충격을 주었으니까요. 88년에 최종학위를 받고, 서울에 오게 되면 틈틈이 거문고 장구 피리도 틈틈이 배우고 전주에 가서 합숙하며 배우기도 했습니다"라고 나효신은 말했다.
그 이후부터 선생님께서 “응 잘 썼어”하시는 곡 말고, 나만이 쓸 수 있는 곡을 써야지라고 생각하며 두 음만 가지고 쓰는 곡을 쓰기로 했다. ‘변주곡’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매일 앉아 있었지만 12분짜리 곡을 쓰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1990년, 그녀의 나이 30세에 초연되었을 때 사람들이 매우 좋아했고 그녀도 기뻤다.
이날 강연에 일곱 개의 곡을 감상했는데, 첫 번째로 감상한 <변주곡>은 피아노곡으로 F#조가 강하고 꾸밈음을 동반한 음들이 무궁동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형태였다. 점차로 피아노의 고음역으로 가고 음폭이 넓어지는 작품이었다.
<변주곡>을 듣고 당시 미국 관객들은 한국에서 온 작곡가가 한국다운 곡을 쓴다고 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 얘기만 했었고, 그녀는 “한국적인 것에 내가 갇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쩌면 좋은가라고 생각했다.
한국악기는 계속 배우고 있었는데, 다른 동양악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중국의 고쟁, 일본의 고토, 샤미센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작품을 쓰면서 다시금 어릴 적부터 배웠던 서양음악이 고스란히 제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한국음악을 하겠다, 안 쓰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매번 하는 작품의 성격에 맞게 저 만의 음악적 텃밭을 가꾸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나효신은 말했다.
Rain Study, 새로운 악보 표기
90년대부터 피아노스터디 시리즈를 해오고 있다. 97년 피아노시리즈를 쓰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 뿐만 아니라, 작곡가에게도 도전이 되는 시리즈를 쓰겠다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피아노 스터디1번, 99년에 2번을 쓰려고 해서 시작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목이 Rain Study로 바뀌었다.
<Rain Study>는 우리나라 노래 '산염불'이라는 시조의 가사에서 착안했다. ‘서산 낙조에 지는 해는 내일 아침에 다시 뜨지만 한 번 간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작곡가는 Rain study의 스터디 부분을 여러 개의 선율이 같은 속도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율은 굉장히 천천히, 어떤 것은 빠르게 여러 개가 동시에 진행되는 곡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작곡가 입장에서 표기가 어려웠고, 피아니스트에게도 어려울 것이 예측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표기법으로 Space Notation을 만들었다. 악보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박자보다는 음표와 음표의 시간적 간격이 중요하고, 장식음이 많다. 어떨 경우는 본음보다 장식음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제 음악에서는 슈베르트나 모차르트의 수식된 장식음과는 다르게 장식음이 주요역할을 한다.
“한국의 사계절처럼 제가 사는 샌프란시스코 계절이 두 개인데, 날씨가 쌀쌀하고 짙은 안개, 혹은 쌀쌀하고 비 이런 식입니다. 제 집 방에 창문이 큰데, 밖에 비가 오면 빗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커요. 팀파니 안에 들어가 듣는 것처럼 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그렇게 피아노 스터디는 제목이 레인 스터디가 되었다.
두 번째 감상곡이었던 <Rain Study>는 나효신의 남편이자 40여년 오랜 음악적 동반자인 토마스 슐츠 교수가 연주하는 영상이었다. 긴 지속음이나 아주 빠른 16분음표의 대조가 아니라 끝없이 쉬지않고 마치 새의 지저귐처럼 읊조림의 반복 같았다. 꾸밈음이나 본음이 함께 겹쳐 톤클러스터처럼도 들렸고 이것들이 페달에 울려 빗소리 뚝뚝거리는 모양처럼 의도된 듯했다.
"피아니스트가 박자를 세지 않고 연주하기 때문에 곡 시작에 메트로놈 박자 표기가 없는 대신에 악보의 한 줄을 몇 초 이내로 연주하라고 제가 말해줍니다. 다이내믹 또한 연주자 자유에 맡겨 연주하는 곡"이라고 나효신은 설명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학교 내 외에도 교회 등에서도 포스터 만들고 음악회에 대한 목마름으로 해왔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2003년부터 90년대부터 Wooden Fish Ensemble이라는 이름으로 동양의 전통음악, 특히 한국의 전통음악, 동서양 악기를 위한 전통음악, 특히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곡가들의 음악만을 연주해오고 있다.
“음악단체 활동을 할 때 작곡가가 끼면 어떤 분들은 내 곡은 절대 안 한다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저는 제 곡은 꼭 한다예요(웃음)”. 한국에서 어렵게 국악선생님들 모셔서 연주를 하면 피리 소리를 듣고 오보에 연주자가, “나는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거야?”라고 놀라곤 했다. 그러면 제가 “피리도 멋지고, 오보에도 멋지니까 모방하지 말고 강요하지 않고, 양보하지도 않고, 서로의 관계가 일방통행이 아니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악기의 성격상 충돌하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제 의도입니다“
2017년에 쓴 해금과 바이올린의 이중주 <나뭇가지의 흔들림(The Sway of the Branch)>(2017)가 있다. 이것은 소동파의 시 ‘산수화를 보고’를 읽고 나서 상상한 작품이다.
산수화를 보고
소동파
가녀린 대나무는
은둔자 같고,
소박한 꽃은
소녀같네.
참새는 나뭇가지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고,
한바탕 쏟아지는 빗방울은
꽃잎에 흩뿌려지고,
날아가려는 새가 날개를 펴니
나뭇잎이 흔들리네.
꿀을 모으는 벌들은
꿀에 빠져 황홀해
참으로 놀라운 재주로다.
붓 한 장과 종이 한 장으로
봄의 모든 것을 그렸구나.
그가 만약 시를 쓴다면
그는 언어의 대가일 것이다.
<나뭇가지의 잔떨림>을 감상했다. 나뭇가지의 움직임과 잔떨림을 각각 동양과 서양의 현악기인 해금의 먹먹한 특유의 소리와 비브라토, 바이올린의 글리산도와 피치카토가 서로 어울리며 보듬어주고 하나되는 느낌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에 더 많이 일해 가야금곡집 출판
2020년에 코로나 팬데믹은 음악가로서 처음으로 어려운 느낌을 가졌다. 매일매일을 잘 살다가 견고한 바닥에 부딪힌 것 같았다. 그래서 제 작곡가의 방에서 생각을 해 보고, “지금은 더 많이 일할 때다”라 생각해서 작품도 더 많이 하고 출판도 더 많이 하고 준비된 자가 되어야겠다라는 해야겠다. 2020년 동안 작품을 7개를 쓰고, 가야금 독주곡을 여덟 개를 출판했다.
“제 작품을 유럽의 렌트로(Rentro) 뮤직에서 40여개를 출판과 유통을 해주고 있어요. 한국악기에 관한 것을 유럽에서 출판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데도, 한국에서 출판되었으면 좋겠다고 놔뒀던 것들을, 가야금 곡 여덟 개를 두 권짜리로 악보집을 내 보자 했어요. 그 중 하나는 병창 곡집입니다. 그 어려운 한국의 가야금 기호를 출판사에서 다 배워서 출판해 줬어요”라는 나효신의 목소리에서 고마움이 묻어났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2020년, 그녀가 열심히 일했던 시기의 작품을 소개했다. 1980년대 그녀가 처음 들었던 칠레의 시인이자 작곡가인 빅토르 하라(Victor Jara, 1932~1973)의 노래로 시가 너무 아름답고 이 작곡가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데 언젠가 이 곡을 주제로 나효신은 변주곡을 쓰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2020년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베짜기 변주곡(Weaving Variations)‘으로 제목을 정했다. 1970년대 빅토르 하라가 여행을 하다가 바닷가의 한 외딴 집에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는 개를 다섯 마리 키우고, 겨울에는 옷감을 짜서 만든 담요를 팔아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여기서 영감을 받은 하라의 노래 가사 중 일부이다.
(가사 중)
....
곤충의 작은 날개처럼
마치 춤을 추듯
실과 엉킨 그의 손
마치 기적처럼
꽃 향기까지 넣어
베를 짜는 그의 손
시간과
눈물과
땀으로 얼룩 진
무시당한 그의 손
.....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그 문학작품을 소리로 설명하겠다가 아니고, 그 문학작품을 읽었을 때의 공감이 커서, 마치 그걸 제가 쓴 것처럼 그래서 이전에는 없었던 소리를 제가 상상하기 시작하는 거죠. 제 방 ‘저금통(작품 착상을 모아놓는 곳)’에는 앞으로는 이렇게 하겠다라는 것들이 가득 있습니다"
그의 인생궤적이 작품궤적이기에 <To the Ice Mountain>,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며> 등의 앙상블 작품들까지 이 날 작곡가의 방에서 총 일곱 곡의 작품을 감상했다. 한시간 반 여의 짧은 시간에 작곡가 나효신만의 음악이 달랐던 이유, 편안하게 들리는데 무척 섬세하고 달랐던 이유를 작곡가 자신의 말로 들을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작곡가 나효신의 음악은 보통의 음악처럼 중심음이나 주제의 변주, 그로부터 파생되는 추진력에 의한 것은 아닌 듯했다. 하나의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각 음들 자체의 에너지로부터 시작하여, 한 악기가 스스로의 사유에 의해 움직이고 악기간 서로 영향을 주는 시간간격을 관객이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음악의 추진력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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