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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80회 (사)한국여성작곡가회 봄 정기발표회 ‘서사에서 선율로 : 한국 단편소설의 음악적 재탄생 - 소설! 음악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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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미디어 2025. 5. 4.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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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제80회 (사)한국여성작곡가회(회장 강은경) 봄 정기발표회가 4월 25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열렸다. ‘서사에서 선율로 : 한국 단편소설의 음악적 재탄생 - 소설! 음악이 되다’를 주제로 여덟 명 작곡가의 현대음악 작품이 초연작품으로 발표되었다.

 

여덟 명 작곡가가 각자 감명을 받은 문학작품으로부터 음 소재와 전개방식을 택했기에 다양한 음악스타일이 나왔다. 또한 조선시대 문학과 20세기 근대문학, 21세기 현대문학으로부터 음악작품들도 작곡가들의 역량과 의지대로 충분히 아름다운 격식을 갖추었다. 현대음악 전문연주단체인 앙상블 아인스와 이윤경의 나래이션, 성악이 결합된 묘미도 있었다. 

 

첫 순서를 조성옥의 작품 <땡볕>으로 음악회의 포문을 인상적으로 열어주었다. 김유정의 ‘땡볕’에서 주인공 덕순과 임신한 아내가 힘겹게 올랐던 언덕과 작열하는 태양빛, 인생의 희망과 허무를 음악으로 인상 깊게 표현하였다. 도입에 이윤경의 나래이션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관객을 인도하고, 악기와 나래이션이 각자, 또 함께 프레이즈와 장면을 구분하는 전개감이 좋았다. 플루트(손소이)의 트릴과 플러터텅잉, 피아노(문종인)의 격렬한 아르페지오가 고음과 저음에 몰아쳤다가 나래이션과 결합할 때는 플루트 혼자 혹은 피아노 혼자 간헐적 음으로 분위기를 낸다. 천천히 상행하는 플루트의 엔딩은 죽음을 앞둔 인생에 질문을 던진다.

 

이재현의 <그 때와 그 시>는 일반적인 현악사중주가 아니라 첼로 대신 콘트라베이스를 써서 저음폭을 극대화한 점이 눈에 띄었다. 헤테로포닉한 움직임으로 짧은 단편의 음소재들이 각기의 길을 가는데도 서로 잘 어울렸으며 현악기 음색을 잘 사용했다. 소재로 한 정약용의 '빈사전'에서 주인이 자신의 지위를 믿고 행동하다가 결국 종보다 못한 위치에 이르게 됨을 비판한 내용이다. 제1바이올린(강민정)의 고음으로 치닫는 선율이 자신의 주장만을 하는 카랑카랑한 주인의 모습이라면 제2바이올린(송화현), 비올라(이상민)를 거쳐 콘트라베이스(김미경)는 항상 본분을 지키는 종의 모습이었을까? 중간부분에 옥타브 유니즌 후 트릴로 각 악기가 선율을 연주하며 대위적인 움직임과 호모포닉한 모습도 번갈아 보이며 대비감을 주었다.

 

김원하 작곡가(맨 오른쪽). 왼쪽부터 강민경(바이올린). 윤혜성(피아노), 이상민(비올라), 주윤아(첼로).

 

세 번째는 이승희의 <빛으로, 숨으로...>는 소프라노 송승연의 나래이션으로 관객을 소설로 이끌었다. 곡은 조해진의 소설 ‘빛의 호위’를 소재로 하여 그 내용을 ‘소외된 인간’, ‘호의로 연결되는 관계, ’연대를 통해 단단해지는 생명력‘의 세 부분 음악으로 표현했다. 단아하게 나래이션을 한 후 소프라노의 풍성한 음색으로 분위기가 전환되며 자유로운 현대음악의 나래를 펼친다. 성악이 전하는 문제제기에 피아노 윤혜성의 유려한 반주와 플루트 손소이의 고음의 트릴과 플러터텅잉이 잘 받쳐주었다.

 

김원하의 <특별할 평범한 미래>는 김연수의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대한 단상으로 작곡되었다. 세 번의 삶이 주어진다는 가정과 현재를 마주하는 자세를 제안하는 소설의 내용을, 작곡가는 평범한 미래가 주는 특별함으로 바꾸어 음악으로 제시했다. 악기는 현악삼중주(강민정, 이상민, 주윤아)와 피아노(윤혜성)였는데, 엷고 선명한 도입의 글리산도가 지금까지의 과거, 술 타스토로 바로크 선율로 바뀌는 지점이 지금까지의 두 번째 시간, 이 둘이 섞이며 변주되며 환희적으로 펼쳐지는 부분이 행복이 깃들 미래처럼 들렸다.

 

마치 AM 라디오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선명하게 한 때의 나른한 추억처럼 앞 선율을 하고 자유롭게 전개되다가 다시 주제가 변형형태로 비올라와 피치카토의 일탈적인 양념이 이어진다. 피아노의 강렬한 클러스터의 4분음표와 끝 트레몰로가 인상적이다.

 

정재은의 <너를 닮은 사람>은 동명의 드라마를 시청한 후 정소현의 원작소설 ‘너를 닮은 사람’을 읽고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 이윤경의 나래이션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다시금 전해 주었는데, 작곡가이기도 한 그녀는 이번에는 반짝이는 의상에 매혹적인 표정연기와 몰입으로 곡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피아노의 저음 아르페지오와 오른손 6연음부가 플루트의 선율과 함께 했다. 악기 간 함께할 때의 6도 화음이 좋았으며, 나래이션이 “나는 너를 닮았다” 한 후에는 피아노의 상행선율, “나는 너를 잊으려 한다” 직후에는 피아노의 격렬한 하행 선율이 느낌을 주었으며, 모순된 욕망과 사랑을 잘 표현했다.

 

여섯 번째로 엄세현의 <유랑>은 나래이션이 분위기 있게 낭독된 후 성악으로 유랑 주제의 외로운 단조선율이 깊게 일렁인다. 1933년 발표한 김동인의 단편소설 ‘붉은 산’에서 영감을 받아 식민시대 유랑하는 비애를 춤곡의 느낌과 반음계와 증음정으로 표현했다. 어려운 현대음악주법이나 무조성보다는 조성에 기반한 자유로운 선법의 창작음악으로 선보이려는 의지가 곡에서 느껴졌다. 테너 손재연이 "아, 아"하면서 애잔하고도 텐션 있는 음색으로 외치는 부분에서 바이올린 송화현의 애절하고 윤택한 선율, 피아노 윤혜성의 몽환적인 음색이 좋았으며, 마지막에 “이 곳, 저 곳” 하는 애잔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무대인사 중인 임현경 작곡가, 이윤경(나래이션), 김민욱(클라리넷), 박새미로(첼로), 김미경(콘트라베이스).

 

김은혜의 <마흔아홉 살>은 첼로 두 대 만으로도 오케스트라 같은 음악적 표현이 되었으며, 소프라노와 정가라는 동서양의 결합이 내면드라마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처음에 첼로 두 대(박새미로, 주윤아)의 글리산도가 단순하게만 반복되나 싶더니 그 제한은 오히려 소프라노 강종희의 나래이션과 고음의 비명, 그리고 정가 조윤영의 흐느낌의 지속음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며 트레몰로와 빠른 반음계로 이어진다. 두 대 첼로가 가운데에 소프라노는 왼쪽 뒤에, 정가는 오른쪽 대각선 앞에 위치해 대비를 준 구도도 특별했다.

 

앞 부분의 현대음악에 대비되는 후반부는 성악과 정가가 단조의 화음을 이루어 우수어린 감정을 전해주며 여기에 첼로가 피치카토와 하모닉스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박완서의 소설 ‘마흔아홉살’의 주인공 카타리나의 사무치는 슬픈 내면과 이를 듣는 청자의 입장을 잘 표현하였다.

 

임현경의 <소리 그림자>는 황순원의 소설 ‘소리 그림자’를 모티브로 했다. 첫 부분에 종과 차임벨, 클라리넷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미분음정의 지속음으로 긴장감을 만들고 이윤경의 나지막한 나래이션이 친구의 부고소식을 알린다. 곡이 네 부분으로 이뤄졌는데 두 번째인 어린 시절의 추억부분에서 이윤경의 웃음소리와 쉼표를 동반한 스타카토 같은 악기의 클러스터 음들이 우스꽝스러운 발자국소리 같이 아련한 추억을 그린다. 친구의 사고를 나타낸 세 번째 부분은 놀람과 당황, 분노를 악기들의 고음과 반복된 음, 빠르게 하행하는 선율로 나타내며 사무치는 인상을 주었다.

 

격조 높은 공연이었다. 추상적인 현대음악이 문학의 서사로 구체화되었으며, 현대음악의 다양성을 제시하는 또 하나의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훌륭한 음악을 선사한 한국여성작곡가회 작곡가들과 이 날의 모든 연주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왼쪽부터 작곡가 이재현, 김은혜, 이승희, 회장 강은경, 김원하, 정재은, 조성옥, 엄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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