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제48회 범음악제(2020 The 48th PAN Music Festival, 집행위원장 임종우)이 지난 11월 5일부터 13일까지 서울 한남동 일신홀 등지에서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한국 최초의 현대음악 페스티벌인 범음악제는 올해 임수연 피아니스트, 앙상블 EINS, Ensemble 거리, TIMF 앙상블 등 국내 최고 현대음악 연주단체를 초청하여 위촉 및 공모선정 작품과 해외 창작품을 소개하며 코로나 기간 현대음악 청취와 배움에 목말랐던 애호가 및 전문가 그룹의 환호 속에 공연되었다. 또한 올해 타계한 한국 현대음악 전자음악의 거장이자 범음악제의 설립자인 고 강석희의 <부루>, <석사자>등이 연주되며, 고인을 기념하는 의미있는 자리가 되었다.
9일 올해 범음악제의 두번째 콘서트로 일신홀에서 열린 앙상블 EINS의 <Sound Texture & Composition>는 앙상블 아인스(예술감독 박명훈)의 숙련된 기교와 전문성으로 클래식 악기의 현대주법과 일곱 작품의 특색 있는 텍스처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김유신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흐름들에서>(2020/세계초연, 위촉작품)는 ‘공기흐름’이라는 자연현상을 술 폰티첼로의 현악기, 아르페지오, 목관의 플라터 텅잉 등으로 밀도감 있게 잘 표현했다. 다리우스 프시빌스키의 <오닉스>(2010/국내초연)는 플루티스트 손소이와 오병철의 투명하고도 때론 세찬 바람소리의 연주에서 모래, 흙이 풍화되어 결이 만들어지고 변성되어 투명하게 암석화 되는 과정이 느껴졌다.
이윤석의 <타-음>(2012/2015)은 피아노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피아니스트 윤혜성이 팔을 극저음과 극고음으로 벌려서 클러스터의 트레몰로로 순식간에 타격하는 강렬함과 빠른 아르페지오, 여기에 페달을 통한 피아노 잔향은 전자음향의 소용돌이처럼 새로운 음색을 선사했다. 김예지의 <충돌들>(2020)은 바이올린, 첼로의 주테, 술 폰티첼로, 클라리넷()의 입술소리, 키클릭 등 현대주법의 소리와 충돌, 그리고 이 충돌이 바이올리니스트 강민정이 몸으로 지휘자처럼 박자를 세면서 서로 조합되어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며 작곡의도를 잘 살렸다.
베른트 리하리트 도이치의 <현악사중주 2번>(2012)는 격렬한 저음 혹은 극고음 글리산도, 비올라의 더블스탑 피치카토 등에서 어떠한 동물의 울부짖음이 느껴졌다. 불협화음 반주 속에 비올라(이상민))가 길게 한 활로 하행 글리산도를 하고, 글리산도가 악기 간 이어져 하나의 큰 선율이 들린다. 신기한 것은 이 곡에서의 불협화음이 더 이상 그것이 아니라 더없이 아름다운 내 속에 내재된 욕구나 그것들의 형상인 듯이 느껴졌다. 중간부에 현악 연주자들이 발을 구르며 목소리로 외칠 때의 그 의외성이 주는 통쾌함이란! 마지막에 불협화음이 주는 불균형한 진동음 지속 위에 첼로(주윤아)의 우아한 선율이 피어오르니 더없이 우아했다.
10일 범음악제의 세 번째 콘서트는 ‘앙상블 거리(음악감독 제러드 레드몬드)’의 <Tradition in the Present> 공연으로 국악기의 현대적 적용이 돋보였다. 첫 곡 황동찬의 <몰아>(2020/세계초연)는 생황(백다솜)이 몰아의 주체로 보였고, 그 신비롭고 미묘한 음색으로 시작해, 거문고를 해머로 두드리고 현을 술대로 문지르는 특수한 주법으로 몰입부터 몰아까지의 과정을 표현했다. 장은총의 <뒤틀림>(2020/세계초연)은 거문고(박정민) 독주의 기본주법을 더욱 부각시켜 현을 술대로 뜯는 기본방식을 응용하는 과정과 여백의 미가 좋았다. 남인성의 <메아리>(2020/세계초연)는 한 음의 끝에서 다른 악기가 맺거나 시작하는 방식으로 메아리를 표현했는데, 대금의 바람소리, 현악기의 콜레뇨, 그리고 점묘적이기 때문에 소리를 기대하는 순간의 느낌이 곡을 잘 진행시켰다.
박정은의 <사랑>(2020/세계초연)은 감정의 견줌과 어긋남을 아방가르드하게 잘 나타냈다. 피아노 현에 모터를 대고, 거문고를 빨래판처럼 활로 가로로 문지르고, 봉지를 현에 비비기도 한다. 이 주법들이 절정으로 격렬해지면서, 마지막에 악기주자 세 명이 양철통에 모터를 넣어 진동소리를 만들면서, 이 곡의 모든 진동들은 화합을 위한 과정이었음을 표현한다. 김정길의 <추초문>(1979)은 피리와 대금, 피아노와 첼로, 징이 한 음씩 천천히 고요하게 등장한다. 단아한 움직임이 허전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를 위해 피어나는 집중력과 서로 간 화합을 위한 과정으로 느껴졌다. 들으면서 작곡의 목적과 시간진행이 탁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이 왔다.
마지막 순서 전에 고 강석희 작곡가의 추모영상이 상영되었다. 생전 활동모습과 함께 “작곡은 발명이다. 음악의 시대정신은 다 같지 않은가. 첨단에 서서 갈고 닦아야 한다” 등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이윽고 강석희의 <부루>(1976/국악기 편성 포함 세계초연)가 시작되었다. 작곡가는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정가처럼 인성으로 시작하는데, 이 노래가 녹음되고 전자음향(임종우)의 저음과 리버브로 증폭되어 스피커를 통해 공연장을 휘돈다. 무에서 무로, 유에서 유로 그 어둔 암흑 속에 빠질 때쯤 두 대 대금이 단아한 선율을 보탠다. 마지막 탐탐의 쇳소리가 귓가 뿐 아니라 몸 속 오장육부를 파고드는 듯 하며 강한 각성을 주었다.
12일 일원동 세라믹팔레스홀에서 열린 다섯번째 콘서트는 앙상블 TIMF의 <Expanding Tonality>공연으로, 조성을 확장시키거나 스펙트럴 음악 위주의 작품들이었다. 첫 곡 강석희의 <농>(1970)은 작곡가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플루트 작품이다. 한국 전통음악의 농현과 장식음을, 북처럼 역할하는 피아노 반주 위에서 플루트의 트릴, 플라터텅잉 등으로 연주하는데, 굉장히 기교적이면서도 색채감이 풍부했다. 마지막에 플루트의 마우스피스를 빼고 퉁소처럼 세워불며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카이야 사리아호의 <빛과 물질>(2014)은 피아노의 Ab 중심음이 물질의 역할을 하며 배경을 제공하고, 바이올린의 술 폰티첼로와 직선적인 보잉이 빛을 쏘는 것 같았다.
세 번째 이성현의 <옹드I>(2020/세계초연)에서 'Onde'는 프랑스어로 파도, 파동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을 위해 곡의 에너지가 상당했다. 1악장은 피아노와 비브라폰의 신비로운 울림으로 시작해 그 잔향 위에 클라리넷과 첼로가 연주한다. 현악기 하모닉스와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시종일관 트레몰로와 빠른 음표로 움직인다. 마지막 바이올린의 트레몰로와 베이스 드럼 등 타악기가 엄청 큰 소리로 연주한다. 2악장은 1악장보다 훨씬 그로테스크하고 소리가 크다. 긴 상행글리산도와 호루라기 소리도 들리고, 클러스터의 연속에 베이스 드럼과 탐탐이 호쾌하게 두들겨댄다. 이 곡 뿐 아니라 이날 작품들에서는 우리가 평소 생각했던 시끄러움이나 고요함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무질서해 보이는데, 각자의 방향성이 있고, 그것이 전체의 형상을 만드는 통쾌함이 있었다.
정세훈 <블루 속으로>(2020/세계초연) 역시 팀프 앙상블 15인 주자의 큰 편성이었다. 작곡가가 말하는 블루는 바다, 하늘, 마음 속 어디일 수 있다고 프로그램지에 씌여 있었다. 베이스 저음부터 중간음역대를 뚫고 나오는 금관, 고음의 플루트와 피콜로, 바이올린 고음 현의 메마른 음색까지 스펙트럴 음악의 미를 살린 큰 폭의 오케스트라 음 진동이 시작된다. 특정 멜로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단순한 선들을 각자의 음역에서 반복해서 연주하는 것이 섞여 빛이 굴절되듯 혹은 파장이 서로 섞이듯 오케스트라 전체가 요동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곡 한스 아브라함센의 <그림동화>(1984) 또한 14인주자의 대편성이었다. 1악장에서 강한 트레몰로, 현악기가 이따금의 피치카토를 연주하는 등 각 개별악기의 움직임이 만드는 복잡 다단한 스펙트럴 뮤직의 헤테로포니적 성격이 동화적 색채를 준다. 2악장은 글로켄슈필의 활력이 경쾌하다. 현악기가 스피카토, 피아노, 플루트의 빠른 패시지로 오밀조밀한 이야기를 재잘거리는데, D조의 말러적 오케스트라 색채도 풍긴다. 3악장 스케르초는 5-7 악기씩 짝을 지어서 트럼펫이 주선율을 하며 두 개의 트리오가 각각 세번씩 나타나며 현악기가 고음으로 치달으며 신비로운 이야기를 끝맺는다.
11월 12일 일신홀에서의 범음악제 여섯 번째 피날레 콘서트는 ‘앙상블 거리’의 <Experimental & New Media>으로 비디오와 조명, 그리고 즉흥 실험의 작품들이었다. 첫 번째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의 <그림자극>(2004)은 흰 조명이 벽에 만든 거대한 피아노의 그림자, 그리고 피아노(제러드 레드몬드 연주) 피아노의 4도음정의 하행스케일을 24초후에 전자음향이 1/4음 위로 녹음재생되는 것이 시간차를 좁히며 끝없이 반복된다. 마치 골목에서 누군가가 쫓아오듯이. 조바심이 날 즈음 확 덮치며 강렬한 트레몰로에 붉은 조명으로 끝나며 여운과 강렬함을 남긴다.
강석희의 비디오를 위한 <석사자>(1990)는 80년대 초 송광사에서 수행하던 외국 미술가인 로버트 대롤과 강석희의 <용>(1986), <봉황>(1988), <석사자>(1990) 중 한 곡이다. 테라 바이트, 기가바이트의 스마트폰 시대에 보는 30년 전 8비트 픽셀 그래픽이 단순하지만 불교의 윤회와 수행을 음악과 함게 드러내는 방식이 한편 운치가 있었다. 플룻의 키클릭, 호흡, 하행 아르페지오 등을 녹음하고 샘플링해 다채로운 음형을 만들고, 그 몽환적인 음악 속에 중간에 영상에 ‘마음 심’자가 한문으로 딱 보이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마지막 순서는 ‘앙상블 거리’의 자연을 소재로 한 실험즉흥음악인 <풍경>(2020, 세계초연)이었다. 세로로 기다란 푸른 조명이 무대에 비추이고, 스피커의 새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맞추어 대금, 바이올린의 트레몰로, 거문고는 술대로 현을 뜯어 연주하며 점차로 격렬해진다. 중간부에 시원한 자연의 느낌이 한참 이어져 좋았는데, 마지막 절정에서는 조명이 빨간 파란 흰 빛을 오가고, 각 악기가 전체 음역대를 오가며 C음 위주로 연주한다. 한참을 들으니 밤부터 아침이 되는 듯 했는데, 이윽고 흰 조명으로 새벽이 밝아오며 ppp에 하모닉스 등의 온음표 등을 연주하며 곡이 끝난다.
한편, 지난 5일의 범음악제 첫번째 콘서트는 임수연 전자음향 <Color Explosion>공연으로 양민석의 피아노와 전자음향을 위한 <기이한 느낌>(2020), 조너선 하비 <메시앙의 무덤>(2011) 등 여섯작품이 연주되었다. 11일 서초 라율아트홀에서의 네번째 콘서트는 신예 작곡가인 주시열, 신예훈, 이본의 작품을 앙상블 TIMF가 연주하며 워크샵 형태로 진행되었다. 9일 <부루>가 공연된 날 객석에는 원로작곡가 이만방, 이영자 및 고 강석희 작곡가의 유족이 참석해 팬뮤직페스티벌과 현대음악 창작에 대한 뜻에 동참하고 있었다.
mazla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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