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아 참, 오늘이 수능날이지! 이 와중에 고3학생들이 수능을 본단 말이지!'
이 생각을 하니 새벽 괜시리 일찍 깨어 오페라 <에르나니>를 이것저것 유튜브에서 참고하다가 눈물이 터져나온다. "아이고, 어떡해. 이거 기사 빨리 써야 하는데."
지난 11월 28일과 2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라벨라오페라단(예술총감독 이강호)의 <에르나니>는 코로나 상황의 올 하반기 보기 드문 전막 오페라, 또한 국내 26년 만의 <에르나니> 공연이라는 기록을 만들며 관객들의 성원에 확실히 보답했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피아베의 대본으로 베르디가 작곡해 1844년에 초연한 이 작품은, 아마도 세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보다는 의리를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고, 벨칸토 오페라 최고의 기교와 고음 때문에 그간 국내에서는 <에르나니>가 자주 공연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라벨라오페라단의 공연에서는 위 이유들이 무색하리만치 자연스럽고 품격있는 연주와 4막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에르나니(테너 국윤종)가 자결하며 누워 부르는 노래마저도 '의리를 선택한 바보'가 아니라 남자들만의 최고의 지조로 여겨질 수 있도록 멋지게 연출되었다. (연출 이회수)
공연이 시작되면, 양진모 지휘의 뉴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품격있는 오페라 서곡으로 공연에 대한 기대를 이끈다. 1막 1장 시작, 반역죄로 스페인 귀족 지위를 박탈당하고 산적이 된 에르나니와 산적 무리들이 노래하고 있다. 노이오페라코러스(단장 지휘 박용규)의 합창이 힘차다. 국윤종은 사랑하는 엘비라를 향한 아리아 '꽃봉오리 속의 이슬처럼(Come rugiada al cespiote)' 에서 밝고 힘찬 기운에 사랑의 느낌이 가득하여 극 진행의 원동력을 주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회수 연출은 압축적인 무대미술을 사용해 시각적인 상징성을 주고, 음악으로 사건을 진행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기로 유명하다. 이번에는 철골 구조물(전막, 회전식), 결혼식 면사포(1막), 반쪽얼굴의 고대 그리스 조각상(2-4막, 회전식), 칼(전막, 소품), 마스크(4막) 였다. (무대디자인 신재희)
이것은 현대오페라의 미니멀리즘적 무대미술 방식이기도 한데, 비닐에 가려져 회전하는 철골구조물과 그리스 조각상 얼굴은 인간의 양면성과 민낯, 욕망을 표현하였다. 또한 1막부터 4막까지 자주 주인공들이 충돌 때 칼을 꺼내듬으로써 4막 에르나니가 칼로 스스로 찔러 죽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1막 2장 엘비라의 방은 그래서 큰 면사포가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소프라노 이다미(엘비라 역, 28일 공연)가 '에르나니... 에르나니, 날 데려가주오(Ernani, involami)'라며 장식적인 기교와 시원한 선율선을 동시에 갖춘 이 아리아를 애틋한 표정연기까지 갖춰 잘 표현한다. 스페인 국왕 돈 카를로(바리톤 최병혁)가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지만 엘비라는 거절하는데, 둘의 듀엣이 면사포(원래 곧 등장할 '실바'와의 면사포인데) 안에서 간절하게 이루어진다.
결국 에르나니가 나타나 남자끼리는 서로를 칼로 겨누고, 당황한 엘비라는 단도로 자신의 목을 겨누는데 이 때의 삼중창은 하이C음까지 가는데도 이들 출연진은 어려움 없이 긴장감과 박진감, 활력 모두를 갖추어 표현했다. 이때, 엘비라의 삼촌이자 그녀와의 정략결혼 상대인 실바(베이스 이준석)가 등장해 '나는 불행한 사나이(Infelice! e tuo credevi)'라며 이 상황에 놀라고 안타타까워 하며 중후하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노래한다. 역시 칼을 치켜올려 들고서.
그 칼이 하나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원래 저 시대 때는 그랬나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1막 중간까지 30분여 안에 모든 등장인물의 성격과 갈등상황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오페라 <에르나니>인데 왜 국내에서 공연이 되지 않았지라는 생각이 지난 27일 라벨라오페라단의 드레스리허설을 보면서 들었다.
위에 26년만의 에르나니 공연에 대한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추측해 봤고, 기자는 27일 드레스리허설과 28일 공연을 보았지만, 앞으로 이 공연을 나도 또 보고 많은 이들이 또 봤으면 좋겠다. 통상의 오페라 공연이 3-4일간 4-6회 공연을 전좌석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번 공연은 이틀간 한 칸 띄어앉기 좌석으로 공연했으니 실예전으로 치면 하루공연만큼의 인원만 관람했기 때문이다.
2막 결혼식을 앞 둔 실바의 성 안, 무대 가운데 거대한 그리스 석상 옆 얼굴이 인상적이다. 망토를 둘러쓰고 순례자로 변장한 에르나니가 침입하지만 실바는 인자하게도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 다른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주역과 합창의 아카펠라(반주 없이 음성만으로 노래하는 것)로 은밀함, 속삭임을 표현한다. 에르나니와 엘비라의 사랑노래, 실바와 갈등의 3중창이 이어진다. 카를로가 엘비라를 납치하자 에르나니가 실바에게 뿔나팔을 건네고 모두들 칼 끝을 모으며 의기를 다지는 합창까지 전음역을 꽉 채우는 오케스트라와 성악은 에르나니를 통한 베르디 본연의 음향관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3막은 선왕 '카를로 마뇨'의 무덤이 무대를 채우고 있는 모습만 봐도 한 편의 서정시가 시작될 것이 느껴진다. 카를로 역 바리톤 최병혁이 첼로 선율 위에 얹어진 '위대한 신이여... 젊은 날의 열정이여(Oh de’verd’anni miei)'를 부르니 통치차로서의 갈등, 아득함에서 그냥 그가 카를로 같다. 실바와 에르나니는 카를로 왕을 시해할 음모를 꾸미며 군중과 부르는 '일어나라, 카스티야의 사자여(si ridest li lion di castiglia)'도 웅장하다. 대북소리가 쿵쾅 들려오고 천장으로부터 크게 걸려있던 금빛 화려한 왕관이 왼쪽으로 이동하는 즉위식과 합창소리에, 이 오페라와 이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4막 시작, 얼굴 모양 가면을 엮은 구조물 사이로 합창이 결혼한 에르나니와 엘비라의 행복을, 가면 쓴 사람의 의혹에 대해 노래한다. 엘비라와 에르나니는 비로소 행복의 노래를 부르지만 그것도 잠시, 망토 입은 실바가 뿔나팔을 불며 에르나니를 위협한다. 실바가 더욱 위협적으로 노래할 때, 앞쪽을 향해 있던 얼굴 석상의 반쪽 옆 얼굴은 없고, 조명이 비춰지니 눈이 뜷려 있어서 더욱 섬뜩하다. 비장미 가득한 삼중창, 에르나니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국 스스로 칼을 꽂고 죽는다. 테너 국윤종이 쓰러져 누워서도 어떻게 저렇게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는가. 박수갈채 속에 막이 내리며 커튼콜로 관객은 환호와 끝남의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 날은 서곡이나 막간곡 뿐 아니라, 성악 반주에서도 현, 금관, 목관 그리고 악기가 아닌 성악까지도 같은 음색과 밀도, 탄력을 가진 것이 음악에 추진력과 응집성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베르디의 음향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이 빚어낸 공연에 대한 열망과 집념이 오케스트라와 성악 모두로부터 더욱더 이런 톤을 완성시키지 않았나 싶다.
공연이라는 순간을 위해 늘 연마하고 달리는 이들이 있다. 물론 기록 영상을 남기고 녹음도 하겠지만은, 계획하여 자신의 기량을 남들에게 선보여 영감을 주고, 일상을 또 내일하루를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작품들이, 공연들이, 공연자들이 있다.
이 날 오페라를 보면서는 '나도 오페라 대본 노래 다 외우고 관람하고 싶다'는 생각이, 오페라 수년간의 관람 중 처음으로 들었다. 이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 리뷰를, 이 기록을 남기기 힘들었다. 내 개인이 느낀 감동을 올곧이 느낌 그 자체로 품고 가고 싶었을 것이다.
올 한 해, 정말 다들 힘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들고 또 덕분에 조금 내려놓고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라벨라오페라단은 <에르나니>를 정말 무모하게도 해냈다. 그리고 그 감격을 글로 일일이 남기는 것은 거대한 공연에 비해서 보잘 것 없고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울고 말 것을, 그냥 내 몸 한 구석에 들어와서 나를 지배할 그날의 느낌을, 여러 사람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적어야 하는 나의 사명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글로 정리해 놓으니, 다시 차분해진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글을 적어야 하겠지.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오후다. 수험생들이 2020 수능을 잘 치뤘길 바란다. 결과야 어떻든, 오페라 에르나니 속 얼굴석상의 양쪽면처럼, 이제부터는 인생의 양면성을 잘 헤쳐나가길 바란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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