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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김이곤의 라라콘서트 vs. 닻올림콘서트 - 즉흥과 작곡 사이

콘서트

by 이화미디어 2022. 3. 2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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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박창수의 연주는 한 음을 내기 위한 기다림과 사유가 인상적이었다.  ⓒ 문성식

[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피아노 소리에 자신의 앞니가 진동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김이곤의 라라콘서트>에서 양 네 손가락을 모아 마구 두드리는 박창수의 즉흥 피아노 소리에 내 앞니의 진동이 느껴졌다.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가야만 할까? 우리 주변에는 잘 기획되고 음악의 다양한 가치를 확산하는 살롱음악회, 실험음악회가 있다. 지난 3월 24일 관람한 <김이곤의 라라콘서트>와 25일 <138회 닻올림 콘서트>가 바로 그것이다. 

24일 <김이곤의 라라콘서트>는 오페라, 무용음악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신동일의 작곡일대기가 녹아난 순수음악 작품 5곡과 하우스콘서트 기획자로 유명한 작곡가 박창수의 심오한 즉흥연주가 피아노 현 위에 올려진 냄비뚜껑과 함께하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종로구 맛집과 한옥 사이의 공간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여기에 인문학콘서트로 유명한 김이곤 음악감독의 정감있는 해설이 더한다. 신동일의 <날개짓하는 작은 새들에게>는 그의 20대 중반 때 데뷔앨범인 '푸른 자전거'에 수록된 피아노 곡으로, 차분하고 순수함이 묻어났다.

 

▲ 바이올리니스트 심정은의 이름처럼 심정을 다한 연주와 테크닉, 피아니스트 신은경의 장단있고 운치있는 연주가 조화로웠다. ⓒ 문성식


두 번째 <새야 새야>는 민요주제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청아하게, 고혹적으로 또대담하게 대항해를 한다. 신동일 작곡가가 94년 이 곡을 미국에서 작곡하고 당시 한국 연주회는 못왔기 때문에 실제 연주는 오늘 처음듣는다고 설명했는데, 30년이 지나 직접 듣는 그 심정은 어떨까 저 바이올린의 카덴차같은 느낌일까 싶었다. (게다가 바이올린 연주자님 성함이 '심정은'이다.)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산조를 생각하며>는 글리산도, 피치카토를 오가며 우리전통 산조의 운치와 사유가 바이올리니스트 심정은의 탁월한 연주기교로 드러났다. <노란우산>은 작곡가의 곡이 그림책으로 게가다 6개국어로 출판되었다는 것 자체로 신기했다. 또한 작곡가의 아내 피아니스트 신은경의 동심과 확신에 찬 리듬과 화음이 영상 속 빨주노초 우산들의 움직임과 어울리며, 글자 없이 음악과 그림(류재수 화가)만으로 희노애락이 가능하구나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쾌지나 칭칭>까지 다채로운 화음과 리듬이 작곡가는 음의 방향을 고민도 많이 했지만 내부에서 흘러나오는대로 부지런히 오선지에 적었구나, 그랬기에 이 날 연주된 순수음악과 더불어 그의 오페라, 무용음악처럼  등 대형음악, 음악이 응용되는 분야까지 뻗어갈 수 있었구나 느껴졌다.
 

▲ 신동일의 '노란우산'. 류재수 작가의 그림과 신은경의 동심어린 연주가 하나되어 보였다. ⓒ 문성식


후반부 박창수의 즉흥은 피아노 혹은 알 수 없는 거인과의 대결 같았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한참을 연주하지 않고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연주회장인 라라장터 밖으로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와 옆가게의 BGM까지 박창수와 피아노 사이에서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이윽고 낮은 음과 높은 음을 아주 천천히 교차하며 내더니 강하게 타격음으로 관객의 허를 찌른다.

그 에너지가 지금 김이곤의 라라장터 유튜브 생중계 채널을 다시봐도 느껴지는데, 음으로 형상을 그리는 방식은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러음으로 구성된 멜로디가 아니라 이렇게 한 음으로 주변공간에 파문을 일으키고 관객을 떨리게 하는 것은 박창수만의 내공일까 아니면 '즉흥'이라는 방식이 가진 사물과 사물과의 조합, 시간의 운용을 사람이 느끼는 방식에 기인하는 것일까.

박창수가 현재 신경염을 앓고 있어 손가락 끝으로 피아노 연주가 어려운 상태라 소개했는데, 그는 손 끝에 약간의 밴드를 감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타격음이 무척 강렬해 앞 자리에 앉은 내 앞니 두개까지 함께 '징~'하며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피아노 현 위에 올려둔 진동벨의 하모닉스와, 마지막엔 저음 F#음의 긴장감 위에 놋쇠 냄비뚜껑을 놓아 신나게 쨍그덕거리는 리듬의 괴팍하고 오랑우탄 같은 클라이막스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음악이었다. 

음악을 잘 들었다면 듣고 난 후 말끔하다. 에너지는 이미 몸 안으로 흡수되었고 말로 설명할 자세함은 사실 기억이 안 나야 정상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비정상이지만 이러한 2차적 작업으로 나는 순간을 저장하고 있기에, 아마 다음날인 25일 관람한 <닻올림 연주회>, 2008년 시작된 사운드와 전자음향 기반의 실험음악 페스티벌 139회차 공연에서 '지나가던 조씨'와 '아체크' 이 두 아티스트의 연주로부터 동일한 메시지를 얻지 않았을까 한다. 

활동명인 '지나가던 조씨(Passing Josh)'에서도 느껴지듯 슬쩍 무언가 던져놓고 갈 것 같은 그의 음악은 두 번째 곡에서는 하모니카 선율이 여러층의 전자음으로 분절되어 겹치고 세 번째 곡에서는 한 옥타브 아래로 변형된 저음 하모니카의 위용으로 탈바꿈한다. 모듈러는 선율을 자르고 겹치며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고 하모니카는 어디서 배를 탈까 노를 저을까, 방향을 바꿀까 도사리다 끝을 맺는다.
 

▲ 지나가던 조씨와 아체크의 즉흥잼은 서로의 방향을 감지하며 한 길을 만들고 있었다. ⓒ 박순영

 
마스크를 끼고 하모니카 부는 흉내로 관객의 코로나 긴장도 풀어주던 조씨는 마지막 곡에서 베트남 민속악기의 요들송 같은 배음렬과 빠른 반복리듬을 모듈러로 더욱 빠르고 여러층으로 확장시키며 오케스트라 같은 웅장함을 선사했다. 전자음향다운 반복의 용이성, 스피커를 통해 증폭된 음의 스펙트럼에 상수동의 지하 한복판에 비오는 날 모인 마니아 관객들은 흠뻑 빠져들었다.

그가 하모니카를 불었는지 코로 술을 마셨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자장비로만 음을 발진할 수 있었을텐데 조씨는 하모니카라는 이동이 용이한 작은 관악기에서 시작해 베트남 민속악기까지 섭렵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음향을 던져준 것이다. 

아체크 음악의 노이즈 음향의 반복성에 처음에는 적응이 필요했다. 뱃고동 소리같은 극한의 노이즈가 무수히 반복되는데 2분 정도 시간이 지나니 은근히 중독되어 온 몸이 나른해지고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뜩이나 센 노이즈성의 음향들인데, 그 위에서 때로 기타선율도 사이키하게 피어오르고, 책상 위아래로 가득 수개의 모듈러와 컨트롤러는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또 묵묵히 그 기계음을 만들며 이 순간을 함께 합창하고 있었다.

관객은 이 노이즈를 노이즈로 듣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이 추구하는 바, 그 순간 판단되어 변조된 소리의 긁음과 소리 서로간의 협조, 그 +, -의 전기에너지가 시간을 타고 요동치는 에너지와 힘, 그리고 아티스트 저마다의 '추구하는 바'를 함께 읽고 느끼려 이 곳에 오는구나, 이 음악을 듣는구나 알 수 있었다. 기타와 모듈러의 주파수와 음량이 Max/MSP에서 반응시켜 증폭된 반복성이 탐미적이다.

아체크의 부호를 관객들이 해독했다면. 이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해독했다고 하니 진짜 각종채소를 갈아넣은 '해독주스'를 마신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지막으로 지나가던 조씨와 아체크의 즉흥연주는 미리 연습한 것이 아닌데도, 짜놓았던 것처럼 반복성이나 서로 치고 빠지는 부분에서 음이 가야할 방향을 알며 하모니카와 기타, 모듈러와 컴퓨터 모두 코로나 2년을 기다려 온 '닻올림'의 닻을 새롭게 조이는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해봤다. 이틀 공연에서 작곡이든 즉흥이든, 그리고 특히 마지막 조씨와 아체크의 즉흥연주를 보면서 '연주는 반복을 통한 개인의 확립, 작곡은 변화를 통한 사회와의 관계'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의 작은 습관이 나를 형성하고 대변하는 한편, 이 사회는 다양성이 의미를 가지고 연결고리를 짓는다는 사실.

소리의 다양성 만큼이나 크고 작은 음악회 모두 우리에게는 배움의 기회이다. 큰 극장도 아니었고 오케스트라나 합창이 다녀간 것이 아닌데 뭔가 크게 얻은 느낌이었다. 또한 양일간 작곡가 신동일의 책 <노란우산>과 작곡가 박창수의 음반, 닻올림 티셔츠와 닻올림 음반을 이벤트로 받았으니 움직이는 자, 생각하는 자 선물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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