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영미 '쭈크러진 창'. 소외된 여인의 삶을 그렸다. ⓒ 정성진
[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AYAF 2015 차세대 공연예술 창작자부문 공연이 한창중이다. 전통, 연극, 무용, 다원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 작가들이 참신한 소재와 기발한 발상으로 기성 작품들과는 다른 예술의 가능성을 선보이고 있다.
1월 2-3주 사이 세 개의 무용작품이 공연됐다. 도황주 <Contact>(1.8-9, 문화역서울RTO)는 이틀공연 전석매진의 인기를 끌었다. 하영미와 김나이의 작품 역시 억압과 고통의 반복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하며 안정되게 공연을 선보였다.
하영미의 무용 <쭈크러진 창>(1.9-11,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사무엘 베케트의 <NOT I>를 모티브로 해 소외된 여인의 삶을 그렸다. 최근 주요 쟁점인 위안부 문제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하영미와 연극배우 양조아의 반복적인 동작과 영상의 암시가 간결하게 조화를 이뤘으며 의자를 오브제로 활용해 장면별 다양성을 확보했다.
공연 전 할머니들의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실제 녹음한 것인지 궁금하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가운데 의자에 하영미가 앉아있다. 제목의 <쭈그러진 창>을 보여주는 가운데 창문처럼 생긴 스크린에는 눈 모양, 열쇠 구멍, 어둑한 물결무늬 등이 나열된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어두운 과거의 흐름이 느껴진다. 퓨전국악그룹 ‘고래야’의 리더 옴브레의 음악은 기타반주와 허밍음으로 흘러간 과거를 가슴 아프게 들여다본다. 영상에 군인 모습이 보인다. 다리가 크게 보인다. 가까이 왔다. 양조아가 브래지어를 풀고, 스타킹을 벗는 마임을 계속 반복한다. 실제 스타킹과 브래지어가 없지만 아주 리얼한 연기다.
▲ 평범한 삶을 만난 그녀들이지만 현실은 무거워 보인다. ⓒ 정성진
그 모습이 처절하다. 허벅지부터 스타킹을 돌돌 말아내려 발끝에서 스타킹의 맨 마지막 끝을 뽑아 벗어던지는 모습은 아주 실제적이고 ‘벗어던지고픈 과거’ 같은 느낌이다. 손님을 맞이하고, 또 맞이한다. 스타킹과 손님, 뒷물의 반복이 하루에도 몇 번씩 끊임없다.
이 때 하영미는 뒤에서 의자 네 개를 가로로 붙여 각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떼었다 세수하고 다시 앉아 엉덩이 떼고 붙이기를 하염없이 반복한다. 끝이 없는 억눌린 일상. 의자를 눕혀 첩첩이 쌓는다.
양조아의 온 몸이 덜덜 떨린다. 손으로 몸을 괴로운 듯 더듬는다. 온몸은 멍들고, 유린당하고, 짓이겨졌다. 이제 스타킹 뿐 아니라 얼굴의 가죽까지 벗어던지고 싶다. 무대 오른쪽 옆에서 빨강색, 왼쪽에서 파랑색 사이드 조명이 비춰지니 그녀는 태극문양이 되었다. 쓰러진 그녀는 가로로 굴러서 무대 뒤로 들어간다.
그녀들에게도 평범한 삶이 가능할까. 갑자기 밝아진 음악은 물방울 소리, 빗소리, 아이들의 합창소리, 기타선율의 맑은 느낌이다. 물방울 떨어지는 영상을 배경으로 그녀들은 토끼처럼 앞다리를 쭈크리고, 깡총깡총 움직인다. 평범한 시간이 찾아왔지만 긴 세월 짓밟힌 삶의 그녀들은, 토끼처럼 혹은 뱃속 태아처럼 온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쭈크러졌다’. 무대 가운데 작은 우물에서 놀던 그녀들은 하영미가 양조아를 업고 무대 뒤로 천천히 퇴장한다. 푸른 하늘의 구름 영상이 잔잔하다.
▲ 김나이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는 이상의 시 ‘오감도’를 실감나는 무대세트로 살렸다.
ⓒ 정성진
김나이의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1.15-16,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는 이상의 시 ‘오감도’를 소재로 했다. 길고 높은 막다른 골목을 무대로 제작해 시의 상황을 표면 그대로 살렸다. 관객은 그 골목 양쪽 위에 올라가 앉는다. 공연이 시작되면 흰색 두 줄 줄무늬의 추리닝을 입은 다섯 명의 ‘아해’들이 골목길에 갇혀 있다. 무용은 원작 시처럼 13명은 아니지만 다섯 무용수가 골목 이쪽저쪽에서 총 열세 번의 등장으로 표현한다.
닫힌 공간에서의 상황들을 그린 영화 ‘큐브(Cube)(1997)’가 떠오르기도 한다. 좁디좁은 공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갈등 속 남녀관계, 탈출하려는 몸부림과 좌절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몸부림치고 팔은 허우적대고 발은 달리며 계속 움직여도 벽뿐이다. 닫힌 공간 속에서 사회는 재형성된다. 여자는 남자에게 성적 굴욕을 당하기도 하고, 남자끼리는 서로 힘을 과시하며 으르렁댄다.
멜로디가 없는 몽롱한 음악은 이들의 상황과 지친 의식을 대변하는 듯하다. 시에서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뿐이 모였고, 다른 상황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했다. 삶의 기본 관계인 하나와 그 반대, 무섭게 하는 이와 그것을 무서워하는 이. 그것을 무용수들은 온몸으로 표현한다. 끝이 안 보이는 기다란 골목. 산소가 모자란 듯 그들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헐떡거린다. 한쪽 방향으로 달리고, 팔로 허우적거리고, 둘이 서로 경계하고, 한 명을 모략하는 등 이런 모습이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 길은 열리지만 과연 그들은 나갈 수 있을까? ⓒ 신희만
이윽고 골목 한 쪽이 열리고 밝은 불빛과 연기가 비춰진다. 하지만 그들은 바깥으로 선뜻 나서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닫힌 반대쪽 벽으로 일제히 쏟아져 들어간다. 나가기를 갈구하지만 하염없이 벽이다. 조명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그들은 매번 다른 반전의 포즈를 취하며 벽에 바짝 매달려 있다.
다시 골목의 가운데 섰다. 한 여자가 헐떡헐떡 숨을 쉰다. 불빛이 들어온 골목 끝을 쳐다본다. 나머지 넷도 함께 바라본다. 그 곳은 열려있다. 그들은 밖에 나갈 수 있을까. 그 쪽을 쳐다볼 뿐이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상의 시에는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라고 적혀있다.
김나이의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는 발표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이상의 ‘오감도’를 무용으로 풀고 직접 무대세트로 골목을 제작해 공간감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무척 신선했다. 다만 음악이 계속 같은 분위기로 지속되어서 무거운 면이 있었다. 또한 골목 위쪽 관객석이 높기 때문에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때로는 앉은 쪽 벽 바로 밑의 무용 상황은 안 보이기도 했다.
AYAF 2015의 1월, 다가올 무용공연은 인간 존재와 최초의 침묵에 대한 김범호(김모든) <침묵의 문>(1.22-24), 일상적인 움직임을 소리로 형상화 한 이수윤 <Inherent Vice(내재적 손실)>(1.23-24), 새롭게 해석한 하회별신굿 탈놀이 안지형 <해(咍) 탈>(1.29~30) 이다. 안무가들의 개성 뚜렷하고 새로운 접근의 작품들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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