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우리가 품은 생각과 감정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는 것을 요즘 경험하고 있다“
이신우 작곡가(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가 지난 3월 29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진행된 ARKO 아창제 제10회 <이신우 작곡가의 방> 시작에 한 말이다.
기성 신진 작곡가 모두에게 대편성 창작관현악 연주의 장이 되어온 아창제(Arko 창작 관현악 축제)가 올해로 15주년을 맞았다. 아르코 측은 작년부터 '작곡가의 방' 을 매달 1회 진행해 아창제에서 작품을 두번 이상 연주한 작곡가의 작품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는 시간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날 강연에서는 이신우 작곡가(55)에게 두 번의 전환기인 1994년에서 2000년, 2020년에서 2024년 사이의 작품과 그 배경을 다루었다. 특히 2020년 코로나시기부터 시작해 그녀가 2021년 8월에 가졌던 이미지, 어떠한 철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것이 안 열리고 그 후 긴 터널을 지나 빛을 본 상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이번 강연이 이루어짐을 말했다.
강연 초반에는 카를 융, 데이비드 호킨스, 안젤름 그륀 등의 저서와 그들의 인용문이 언급되었다.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심리학, 영성, 종교, 철학을 지난 4년간에 공부하며 자신의 고민, 갈등을 연구하게 되었다. 융이 우리를 에고(ego, 표칭적인 나)와 셀프(self, 좀 더 깊이 있는 내면의 나)로 나누었다는 설명, 그리고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니엘 캐내만이 자아를 배경자아(Background Self), 경험자아(Experiencing Self), 기억자아(Remembering Self)로 나누었다는 설명 등 심층적인 내용이 이어졌다.
1994년 26세 때는 이신우가 처음으로 거듭났던 시기이다. 영국유학 박사과정 때인데, 그녀는 요한복음 성경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삶과 작품,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 진리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2020년에서 24년의 시기는 에고(ego)의 껍데기를 버리고 나비가 되는, self가 되는 시기였고, 그 시점은 2021년 8월이었다.
작곡가 이신우에게 스승은 어떤 존재일까. “서울대 강석희 선생님, 영국에서 마이클 피니시 선생님 모두 직설적인 분들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제자들은 기죽기보다 선생님의 말씀이 오히려 재밌고, 제자들끼리 선생님 말씀 듣고 농담도 하고 그랬습니다”라면서, “강석희 선생님은 저와는 작곡방향이 다르지만, 논리, 구조적인 면에서 제 그릇을 넓혀주시고 하드웨어를 만들어 주셨어요. 피니시 선생님은 저의 소프트웨어를, 즉 어떤 건 꼭 필요하고 안 필요한지를 작곡에서 결정할 수 있게 이끌어 주셨습니다”라고 두 스승에 대해 말했다.
그가 유학 당시 곡을 어렵사리 100마디 써서 갔더니, 피니시 선생님이 보시고는 “그건 됐고, 저기 도서관 가서 시편 20편(BC 1010년경 텍스트)과 고대 히브리어 자료를 읽고 나서, 현대음악 작곡가인 네가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히브리인들이 제의 드리는 그 모습을 현대오케스트라로 구현해 보면 어떻겠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승의 말씀을 고지식하게 잘 들었던 이신우 작곡가는 1년간 곡을 안 쓰고 도서관에서 각종 철학, 역사 책을 깊게 읽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의 작곡방식은 신앙적이라기보다는 철저한 조사에 근거한, 신앙적인 것을 의식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려 철저히 객관화한 방식이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편 20편>(1994/1996)은 그렇게 나왔고, 그 이후에 쓰여진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주 큰 변화가 있었다.
1999년은 이신우가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부임하던 해로, 최우정(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 류재준(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과 함께 3인 음악회를 준비할 당시였다. 지도교수도 없고 뭘 써야할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의 시기여서, 리게티나 펜데레츠키 스타일 혹은 아방가르드하게 써도 곡의 진전이 40마디를 못 넘고 버리게 되었다. 뭐라도 쓰느냐 아니면 공연을 취소하느냐 사이의 결정에 대해 주변 지인에게 의논하니, “다시 이전으로 회귀해라” 혹은 “어차피 벌어질 일, 그냥 해보는게 어때” 등 두 갈래 의견이 있었는데 결국 “그냥 해보는 게 어때”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첼로와 현을 위한 <애가(愛歌)>(1999/2021)가 탄생하였다. 요한복음 21장 배신자 베드로가 부활로 찾아오신 예수님과 조찬을 먹는 장면,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어보신 텍스트로 곡을 썼다. 99년 초연 후 당시에는 개인의 감정과 같은 스타일로 아무도 곡을 안 썼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워서, 한 동안 이 곡을 연주하지 않다가 2021년 개작초연 하였다. 22년이 걸렸다. 강연 현장에서 곡의 앞부분을 감상하였는데, 첼로는 예수님의 말씀이고 현악기그룹은 말씀의 빛과 아우라 같은 영성이 느껴지는 곡이었다.
“조금 더 중요한 얘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라며 이신우는 강연을 이어갔다. 그녀의 주변에는 의식, 논리, 지성으로 음악을 하는 동료와 지인이었지만, 자신의 곡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고 음고와 논리로 분석하기에는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이런 고민을 20년 해 왔다. 여기에 작곡가인 그녀에게 연주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 왔다. 이신우의 대표작 <코랄판타지>(2007-2009)는 50여분 길이의 10개 악장의 피아노 독주곡이다. 당시 1악장 ‘신포니아’를 써 놓고는 “이게 뭐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배운 고차원의 논리로 스스로의 곡을 이해할 수 없는 시기를 오래도록 견뎌가며 계속 곡을 썼다.
이런 의문의 때면, 소중한 지인 피아니스트 허효정과 바이올리니스트 유시연(숙대 교수)은 이신우에게 용기를 주었다. 허효정은 이신우의 <코랄판타지> 전곡으로 카네기 홀과 미국, 유럽투어를 하고 음악학 논문(‘음악논단’ 33집)도 쓴 바 있다. 피아니스트 허효정은 “바쁘고 분주했던 일상 가운데 선생님의 ‘신포니아’를 치면 눈물이 나요”라며 이신우 곡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말해주었다. 작곡가의 곡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접속되어 있고 논리로 파헤칠 수 없는 다른 영역에 있다는 것을 연주자가 일깨워 준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니 작년 12월 <죽음과 헌정>과 올해 2월 아창제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을 비롯해 그간 작곡가 이신우의 곡을 들었을 때 다른 현대음악작곡가와 같은 복잡한 기교나 미분음이 없는데도 오히려 심오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지 점점 이해되기 시작했다.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2000/2002)은 2000년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작품이다. 여러 번 공연되었는데 2000년 작곡된 후 2002년 3악장을 추가하여 아창제에서 연주되었는데, 3악장이 사무엘 바버나 말러 느낌이 나서, 이번 2024년 2월 아창제 공연을 위하여 3악장을 새로 다시 썼다. 돌아가시기 전 성탄 즈음 세례 받으실 때, 그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말 아름다운, 그 에고가 깨어진 모습이었다. 강렬한 인상은 이신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질병으로 인해 깨어졌지만 정말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게 저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느꼈고 그 기록들을 그녀는 음악으로 담아냈다.
<첼로와 현을 위한 <애가(愛歌)>(1999/2021)>를 작곡했을 때의 일이다. 처음에 이것을 쓰고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첼리스트 제임스 김과 원주시향 김광현 지휘자가 연주를 정말 잘 해줬다. “작곡가는 작곡가의 호흡을 살려줄 수 있는 연주자를 만나는 것이 관건입니다. 제 곡에 지속음이 많기 때문에 현의 소리를 어떻게 풍부하게 내느냐에 따라 느낌이 굉장히 달라져요”라며 김광현 지휘자가 아픔의 마음을 담아 연주하고 해설도 해주었기에 작곡가와 연주자, 관객의 연결이 잘 되었다.
이신우 작곡가는 국악에도 크게 관심을 가지고 <여민락>, <대지의 노래> 등을 만들었다.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서양음악은 우리가 만들려고 갖가지 소리를 쓰면서 용을 쓰는데, 국악은 음 하나로 온 우주가 되고 한 번에 되더라. 나이 들면서 만들기보다는 기존에 있었던 소리를 내보내게 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제가 한국 음악과 만나게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비올라와 소리북을 위한 카프리스 No.2 <적벽>(2020/2022)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을 위해 이신우 작곡가는 조상현 명창의 소리를 음고 분석하고 채보했다. 연주는 Mutter Virtuosi 연주자인 이화윤 비올리스트가 했는데, 당시 이신우는 영국에서 연구년이었고 이화윤은 KBS 녹음차 한국에 있었는데, 새벽 3시 반에 전화 와서 마무리 음의 뉘앙스를 물어볼 정도로 열정과 정확성이 있었다. “그거 마지막 음이 별 것 아니거든요. 그냥 잔잔하게 끝나는 건데, 그런데 그 하나를 가지고 집중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라고 이신우는 말했다. 곡 감상의 시간을 가졌는데, 한국 전통 산조 선율과 운동성이 비올라의 중저음과 활의 운궁을 통해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흥을 돋우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BKEAhF30SE&list=OLAK5uy_lZ5OOMUrYvksGf9uTEwbVnrrD4aT3NSOE&index=2
이번 좌담의 마지막에는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죽음과 헌정>(2020)을 감상했다. 이 작품은 2023년 12월 IBK챔버홀에서 초연되었지만, 코로나기간인 2021년에 SONY 음반으로 먼저 나온 바 있다. 1900년대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로, 조선에 무척 오고 싶어했던 그는 대동강에 배가 닿자마자 조선 군인과 백성들의 저항으로 전투가 벌어져 죽게 된다. 죽기 직전 한 병사에게 전해준 성경이 조선에 보급되어 이 곳 기독교 신앙의 싹이 되었다는 점이 무척 아이러니하다. 이 작품에서 작곡가 이신우는 인간의 복잡다단한 모습을 표현하고 모순과 상처를 드러냈다.
이 날 작곡가의 방에서도 전곡을 감상하고, 작년 12월 기자 또한 IBK챔버홀에서의 초연을 관람했는데, 신앙적인 음악은 투명하고 간결하면서도 음간의 긴밀한 관계로 강렬했고 반복에 의해 굉장한 힘이 있었다. 1악장의 메시지는 ‘사랑’이다. 저음 뱃고동처럼 시작해 반복과 격렬함이 공포에 떠는 조선 백성들을 향한 선교사의 사랑을, 2악장은 잔잔하게 시작해 첼로의 극고음이 어미 동물의 울음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물결 같은 맑은 피아노와 잔잔한 마음같이 울려퍼지는 3악장은 죽은 아내 캐롤라인을, 수선화 핀 웨일즈 언덕을 그리워하는 토마스의 눈물을 표현했다.
많은 분들이 특히 3악장을 사랑해주고 있는데, 작곡가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하늘이 뚫려있는 것처럼 받아 적어서 빠르게 작곡했다고 한다. 4악장은 무반주 첼로로 극렬의 고통과 비탄을, 5악장은 1악장 첫 도입의 피아노 네 음이 강렬히 반복되며 첼로는 이전까지의 사건을 빠르게 반추한다. 이후 6악장 표시말인 ‘Humble, Plain'이 인상적인데, 나지막한 신앙고백처럼 읊조린다. 마지막 7악장 ’Serene, Transparent and Bright'는 우리의 도달 지점이다. 몇 음 안 되지만 우리의 마지막 남은 고차원의 의식과도 같다. 첼리스트 제임스 김과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성신여대 교수) 또한 자신의 삶과 사랑, 고통과 희망을 담아 작곡가의 헌정이 관객에게의 헌정이 되는 연주를 해주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SXC16bQmG4&t=15s
이신우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에고의 껍데기를 깨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 순수의식에 가까운 그 모습까지 한 세계를 살면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저는 이제 제 나이가 작곡가로서는 초등학생,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창작자들에게 크나큰 용기를 주는 말이다.
90분의 강연이 끝나고 30분 질문과 답이 오갔다. 이소영 평론가(음악연구소 NUNC 소장, 전 명지병원 예술치유센터장)은 “치유의 개념을 정리해줘서 고맙다. 또한 이신우 선생님의 곡이 아름답고 구원적이어서 영적인 측면만 보고 그 이면의 (밑에 수반된, 극복된) 상처나 부정성을 이전엔 잘 못 봤었는데, 오늘 그 선입견과 화해하는 지점이 되어 반성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노유경 음악학자는 이신우 작곡가에 대해 “자기 음악의 어떤 색깔을 찾는다는 게 진짜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이신우 선생님이 그 색깔을 지금 새로운 에너지로 찾게 된 게 정말 너무 다행이고 응원을 하고 싶다. 앞으로 음악 학자로서 더욱 눈여겨 선생님의 곡을 좀 들여다보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아래는 그 외의 질의응답 중 일부이다.
문) 요즘 학생들의 경향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기술의 진보는 대단하다. 하지만, 화려한 텍스처와 주법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줬으면 한다. 그런데 이것은 개별 작곡가 탓이 아니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Pressure(압력) 탓이다. 오늘 중앙 콩쿨 심사도 보고 왔지만, 사실은 콩쿨도 그것을(개성 없는 기술의 나열) 원하지 않는다. 결국 곡은 자기 책임이기 때문이다.
문) 현대음악의 구조나 형식, 텍스처를 공부하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 추천?
- 그런 책은 없다. 대신에 좋아하는 작곡가의 곡을 분석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래도 책을 보고자 한다면, 찰스 로즌의 <클래시컬 스타일>이 있다.
문) 어릴 때 어떤 계기로 음악에 접어들게 되셨는지요?
- 중2때 진은숙 선생님께 배웠다. 동네에 평론가 이상만 교수님의 딸 이나리메씨 집에서 그녀와 함께 작곡을 배웠는데, 100년 된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었다. 무채색이었던 내 어린 시절을 유채색으로 만들어줬던 음악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2시간의 레슨 동안 하하호호 웃었던 시절이다.
한편, 제11회 아창제 <이귀숙 작곡가의 방> 은 오는 25일 오후 5시,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진행된다.
(공식페이스북) http://facebook.com/news.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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